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조별리그 D조 예전 경기에서 일본을 1대 0으로 이긴 뒤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선수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은 2017년 10월 25일 베트남 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부임했다. 23세 이하와 성인대표팀 사령탑을 겸직하는 게 조건이었다. 박 감독이 처음 베트남 대표팀을 맡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대부분의 축구인들은 그의 선택을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축구에서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가 ‘어쩔 수 없이’ 베트남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박 감독은 대표팀과 K리그 코치를 거쳐 2005년 경남FC 초대 감독으로 취임해선 2007시즌 경남을 4위까지 끌어올렸지만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팀을 나와 이후 전남 드래곤즈 사령탑으로 부임한다. 전남 감독 부임 후 FA컵 준우승을 이루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고 이후에는 리그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2012 시즌, 상주 상무 감독을 맡아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던 박 감독은 2015년 12월, 상무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상주를 떠났다.
이후 그가 향한 곳은 아마추어 내셔널리그(3부리그) 팀인 창원시청. 박 감독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창원시청의 2017년 내셔널리그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창원시청 감독을 맡고 있을 때 베트남축구협회의 러브콜을 받았고, 박 감독은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박 감독이 베트남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할 때만 해도 현지에선 박 감독을 환영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베트남 언론들은 자국의 대표팀 감독을 유럽 출신도 아닌 고작 한국의 3부리그 팀을 이끌던 지도자를 데려왔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쏟아냈다. 박 감독은 당시의 상황을 한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회상했다.
“키가 작은 지도자가 와서 신장이 작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춘 지도를 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걱정과 불안이 컸다.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프로팀 지도자가 아마추어 내셔널리그 팀을 맡았다는 건 축구 지도자로서 거의 정리할 단계라는 걸 의미한다. K리그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베트남 대표팀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밀려나기만 했던 한국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던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과 우즈벡의 AFC U-23 챔피언십 결승전을 앞둔 박항서 감독. 사진=아시아축구연맹 공식 페이스북
사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협회의 차선책이었다. 영입 후보 1순위가 따로 있었지만 계약이 무산되면서 그 기회가 박 감독한테까지 돌아왔다. 베트남 축구협회는 박 감독이 2002 한일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해 한국의 4강 신화를 일군 수석 코치였고, 그 해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동메달을 획득한 경력을 높이 평가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 프로 팀이었다면 고려하는 수준에 머물렀겠지만 놀랍게도 대표팀 감독직이라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면서 “내가 만약 K리그 감독을 맡고 있었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베트남 대표팀은 아시아권에서도 대표적인 약체 팀이었다. 그러나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전혀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부임 3개월 만에 자신을 향한 불신을 일시에 잠재우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베트남 대표팀이 2018 아시아 축구연맹 U-23 챔피언십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박 감독은 베트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회 준비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흔히 외부에선 베트남 선수들의 체력이 약하다고 말한다. 내가 직접 확인한 선수들의 체력은 전혀 약하지 않았다. 체격이 왜소했을 뿐이다. 선수들에게 체력이 강하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선수들을 자극하고 동기부여를 제공하면서 천천히 선수들한테 다가갔다. 어쩌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게 장점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선수들과 말 대신 스킨십을 나누며 친근함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국 대표팀을 이끌 당시 식사 자리에서 네덜란드인 코치들이 자국 언어로 대화하는 걸 금지시킨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얘기하는 걸 실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후배의 엄격한 서열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끌기 위해 식사 자리를 돌아가면서 앉게 했다. 훈련할 때 “명보 형” “선홍이 형” 대신 “명보” “선홍”이라고 부르게 했던 일화도 잘 알려진 내용들이다.
2002년 한국 대표팀 당시의 박항서
순수함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은 자신을 아들처럼 아끼고 챙기는 한국인 감독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한 마디의 말보다 선수들과 포옹하고 다친 부위를 함께 돌봐주면서 정성을 쏟는 감독을 위해서라면 필드에서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베트남 정신’이 베트남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박 감독은 ‘2018 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이루며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은 박 감독한테 3급 노동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에서 저평가 받았던 지도자의 엄청난 변신이었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며 ‘박항서 매직’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이영진 수석코치의 역할이 컸다. 럭키금성(현 FC서울)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이후 30년 동안 선후배의 연을 이어갔다. 박 감독이 처음 베트남행을 제안했을 때 이 수석코치는 박항서였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한 배를 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 감독은 베트남 언론인 ‘VN익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영진 수석코치는 내 브레인이다.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다양한 문제점들이 생기는데 이 수석코치는 그 모든 걸 다 생각하고 준비한다. 나는 그저 그의 여러 방안 중에서 한두 가지를 결정할 뿐”이라며 이 수석코치를 높이 평가했다.
전술적인 부분에서도 박 감독과 이 수석코치는 최고의 호흡을 나타냈다. 다양한 전술 변화를 추구하는 베트남 축구와 두 사람의 축구 철학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특히 U-23 챔피언십대회에서 베트남은 3-4-3을 기본으로 3-5-1, 3-5-2, 4-4-2로의 변화무쌍한 전술을 선보였고 덕분에 결승까지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적극적인 스킨십과 선수들에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사람이 박항서 감독이라면 이영진 수석코치는 세밀한 전술과 전략을 맡아 ‘브레인’을 자처했고 피지컬 코치인 배명호 코치는 왜소한 체격의 선수들이 단기간에 체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을 구해 함께 생활하는 감독과 코치들의 ‘합’이 ‘박항서 매직’을 만든 셈이다.
결과적으로 박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과의 만남은 서로에게 ‘윈-윈’이 됐다. 59세의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지도자로 뒤늦은 전성기를 이루고 있고 베트남 대표팀은 한국인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투혼으로 점철된 ‘베트남 정신’을 제대로 알리고 있다. ‘박항서 매직’은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만나 기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오는 27일 오후 9시30분 시리아와의 8강전을 통해 베트남 대표팀은 또 다시 새로운 역사에 도전한다. 베트남이 시리아를 꺾고 한국이 8강에서 우즈베키스탄을 누른다면 베트남과 한국의 4강전이 펼쳐진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고 운명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한국은 ‘가시밭길’ 베트남은 ‘꽃길’로…조별리그 이변에 엇갈린 행보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3 대표팀이 23일 이란과의 16강전에서 황의조, 이승우의 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둘 때 같은 시각 열린 또 다른 16강전이었던 베트남-바레인 전에서 베트남이 1-0 승리를 거뒀다. 한국과 베트남이 나란히 8강에 오르자 두 팀이 준결승전에서 만날 가능성을 두고 축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우승 후보로 꼽혔던 한국은 ‘프리미어리그 스타’ 손흥민을 비롯해 유럽파, K리그 선수들까지 총동원됐지만 바레인전 6-0 대승 이후 말레이시아와 2차전에서 1-2로 패하고 키르기스스탄과 3차전에서 겨우 1-0으로 승리하며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덕분에 조 2위가 되면서 토너먼트에서 이란, 우즈베키탄 등 우승 후보들과 만나며 가시밭길을 자초했다. 반면에 베트남은 조별리그 D조에서 우승 후보 일본을 1-0으로 꺾는 등 3전 전승으로 조 1위를 차지, 16강전에서 바레인을 상대했다(조별리그 전승은 25개 참가국 중 베트남, 중국, 우즈베키스탄 3개국 밖에 없다). 이후 상대할 시리아는 한국이 만나는 우즈베키스탄보다는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다. 아시안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과 한국이 대회에서 만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것으로 보인 베트남은 3전 전승을 이뤘고, 조별리그 1위에 오를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은 2승1패로 조 2위에 올라 이란을 꺾고 우즈베키스탄과 만나게 됐다. 베트남은 한국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막상 뚜껑을 여니 베트남의 상승세가 무서울 정도다. 한국과 베트남이 만나려면 8강전을 넘어서야 한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은 사실상의 결승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국은 불과 7개월 전 2018 AFC U-23챔피언십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만나 연장전에서만 내리 3골을 허용하며 1-4 패배를 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선수들과 감독, 코칭스태프의 구성은 변화를 이뤘지만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27일 8강전에서 승리하면 이후 단 하루만 휴식을 취한 채 29일 4강전을 갖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