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2일 문을 연 서울회생법원. 서울회생법원 개원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회생·파산 사건이 급증했고 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법원 설치의 필요성이 높아진 데 따른 조치다. 연합뉴스
개인회생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파탄에 직면한 개인채무자의 채무를 법원이 강제로 재조정해 개인채무자의 회생을 도모하는 제도다. 개인회생 신청자가 변제계획안을 제출하고 변제계획이 인가되면 3~5년간 변제계획을 수행하며 일정 금액을 갚고 채무를 면책받게 된다. 그러나 변제계획을 수행하는 기간이 길어 중도 탈락자가 속출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법이 변제기간 상한을 5년으로 규정하고 있어, 대부분 사건이 5년으로 획일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7년간 60만 건의 개인회생이 접수됐으나, 최종 면책된 사건은 21만여 건이다. 면책까지 성공한 비율이 34.85%에 불과한 것. 더구나 2010년 접수사건의 인가 후 중도 폐지율은 24.7%였으나 2011년 30.5%, 2012년 32.9%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에 변제기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제도 개선 논의가 진행됐고, 지난해 11월 국회에서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개인회생 변제기간을 기존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계나 자영업자의 과중한 부채조정이 활성화돼 가계의 파탄을 방지하고 채무자의 경제적 재기를 촉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이 통과되자 서울회생법원을 비롯한 전국 지방법원은 법률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 1월부터 변제기간 3년 단축을 허용하는 업무지침을 제정해 조기 시행했다. 그러나 서울회생법원이 신규신청사건은 물론 기존사건에 대해서도 모두 단축을 허용한 반면, 각 지역 지방법원들은 인가 후 기존사건에 대해 불허 방침을 내놨다. 지방에서 채무변제계획에 따라 채무를 변제 중이던 기존 회생자들은 변제기간을 단축하지 못하게 된 것.
울산지방법원에서 1년 7개월째 개인회생 중이던 정 아무개 씨(29)는 “지난 2월경부터 변제기간 단축 이야기가 나와 기대를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서울과 달리 지방법원에서는 인가 후 사건에 대해 불가하다는 입장을 내놨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련해 울산지방법원에 처리 방침을 문의했으나 대법원에서 따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변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며 “그러나 대법원은 다시 ‘지방법원에서 해야 할 일’이라며 서로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 씨에 따르면 현재 인가를 받은 채무자들 가운데 다수는 지방법원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놓지 않아 마냥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1년가량 변제계획을 수행해오던 이들은 취소 후 재신청해 3년의 변제기간을 얻게 돼도, 오히려 현재 남은 변제기간보다 더 짧은 변제계획만 수행하면 되는 상황이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회생자들의 민원이 이어지자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와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금융정의연대 등은 채무자회생법의 개정 취지를 고려해 전국적으로 일관된 기준을 마련해 시행해달라며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는 의견서에서 “법원에 따라 변제기간 단축여부가 달라지는 것은 채무자들 사이 부당한 차별을 불러일으키고,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는 지난 6월 14일 회신을 통해 “변제계획 변경안에 대한 변경인가 여부는 채무자의 재산, 소득 및 생계비 등과 채권자 등 이해관계인의 입장, 그리고 법률이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당 재판부가 변경인가 여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개별사건에 대한 재판사항에 관한 것”이라며 “법원의 재판에 의해 그 기준이 정립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답했다. 사법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법원행정처가 재판사항에 대한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일관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
이에 법조계 일각에서는 지방법원이 기존 회생자들의 변제계획 변경안을 허가해주지 않는 이유가 업무량 증가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지난 6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법원 노조)가 발표한 다면평가 결과에서 이경춘 서울회생법원장이 유일하게 부적합 평가를 받았다. 법원 노조는 이 법원장의 부적합 사유에 대해 “이 원장은 지난 1월 개인회생 변제기간을 단축하는 법이 시행되기 전 사전실시과정에서 준비 없이 밀어붙였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법원 노조는 앞서 지난 3월에도 성명서를 통해 법원행정처에 개정안 시행 후 증가할 업무량에 맞춰 개인회생 직원을 충원하도록 요구한 바 있다. 당시 법원 노조는 “서울회생법원은 업무지침을 만들고 이를 전국 법원이 따라주길 바란 것 같지만 많은 법원들이 이를 따를 엄두를 못 내고 있다”며 “실질적 업무량이나 세부적 업무 부담을 전혀 고려치 않고 업무지침을 시행해 인원충원은 요원하고 일선 직원들은 고통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개정안이 시행됐음에도 불구, 법원의 인력이 부족해 다수 지방법원이 인가 후 개인회생사건에 대해 수용하지 못하고 그 피해를 지방법원에서 개인회생 중이던 기존 회생자들이 보고 있다는 것. 한 개인회생 신청자는 “인가 후 신청에 대해 변제기간 단축을 허용하게 되면 들여다볼 자료가 많아 업무가 급증할 것을 우려해 지방법원이 눈치를 보는 것 같다”며 “일관된 업무처리를 통해 서울과 타 지역 간 차별을 없애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또 다른 개인회생 신청자 역시 “벼랑 끝에 서 있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희망이 개인회생”이라며 “금융약자인 채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고 토로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