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발 장기집권플랜이 시험대에 올랐다. 친노(친노무현)계 좌장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5·9 대선 직전 ‘20년 집권론’을 제기한 지 1년 4개월여 만이다. 이 대표의 보수궤멸을 통한 장기집권플랜은 올해 초 추미애 전 대표와 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이 이어받으면서 불씨를 살렸다. 꺼지지 않은 불은 다시 이해찬호의 품으로 들어갔다. 결말은 둘 중 하나다. 20년 집권 토대를 마련하든지, 4년 뒤 정권을 내주든지다. 결론은 간결하지만, 그 과정은 고차 방정식이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 이종현 기자
장기집권은 진보진영의 숙원이다. 문재인 정부를 제외하면 정부 수립 후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은 적은 고 김대중(DJ)·노무현 정부 10년에 불과하다. 수평적 첫 정권교체도 반세기나 걸렸다. 민주정부 1기와 2기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2007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은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후보로 나선 이명박(MB) 전 대통령에게 역대 최대인 530만 표 차로 참패했다. 그로부터 1년 반가량이 지난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 지금도 여권 인사들은 “MB의 정치적 보복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날을 세우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여권발 장기집권플랜의 시작점이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참여정부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고 진보개혁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장기집권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도 “국민의정부·참여정부 10년으로는 정책이 뿌리를 못 내리고 불과 2∼3년 만에 뽑히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해찬호가 협치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애초 20년 집권론 기저에는 한국당을 축으로 하는 ‘보수 궤멸’ 작전이 깔렸다. 이 대표는 문재인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시절인 지난해 4월 30일 충남 공주대학교에서 가진 지지연설에서 “극우 보수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며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다음에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많다. 안희정·이재명·박원순 이런 사람들이 이어서 쭉 장기집권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대표가 던진 장기집권플랜은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와 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이 받았다. 이들은 그간 “최소 20년 집권 정당을 만들 것”이라고 진보집권플랜에 힘을 보탰다. 민주당의 ‘민주정부 3기 출범→6·13 지방선거 승리→동진 전략 교두보 마련→4년 중임제 개헌’ 등의 장기집권플랜 시나리오가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민주연구원과 당 정책위원회 등은 20년 집권플랜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3단계까지는 성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지방선거 완승을 통해 영호남을 묶는 남부민주벨트의 한 축인 부산·경남·울산(PK)에 거점을 확보했다.
여권발 장기집권플랜인 동진 전략에서 남은 것은 대구·경북(TK)이다. 이 대표는 8월 29일 경북 구미에서 첫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했다. 이 대표는 취임 후 첫 공식 행보로 DJ와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물론, 고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도 참배했다. 6년 전 민주통합당(현 민주당) 대표 시절 땐 “패악 무도한 정권을 끝장내야 한다”고 말해 보수진영의 극한 반발을 샀다. 이 대표가 동진 전략의 약한 고리인 TK를 전략적으로 택했다는 분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구미를 찾은 이 대표는 “민생경제를 살리는 데 좌우가 없고, 동서 구분도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호남 기반인 민주당이 영남, 그것도 소외된 TK를 끌어안아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오는 2020년 총선에서 TK 의원을 배출하겠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의 구미행이 21대 총선을 겨냥한 이른바 ‘영토 확장’ 작전에 가깝다는 얘기다. 정두언 전 한나라당 의원도 이를 “총선 행보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이 대표는 금명간 ‘민주정부 20년 태스크포스(TF)’를 띄울 예정이다. 홍의락(대구 북구을) 민주당 의원에게 중책을 맡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권발 장기집권플랜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우선 20년 집권을 이끌 ‘수단’이 마땅치 않다. 이 대표는 20년 집권론과 함께 ‘최고 수준의 협치’를 내세웠다. 이 대표는 취임 직후 “주제와 형식에 상관없이 5당 대표 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면 좋겠다”며 몸을 한껏 낮췄다. 문 대통령도 9월 남북정상회담에 여야 의원 동행과 청와대 여야 대표 회동을 제안했다. 동시다발적인 협치 구애다.
효과는 물음표다. 한국당 핵심 관계자는 “언론 플레이”라며 당·청 제안을 일축했다. 야권 내부에선 이 대표의 20년 집권론에 대해 “오만방자한 얘기”라며 격앙된 분위기도 감지된다. 김동철 바른미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그간 협치 실패에 대한 ‘선 유감 표명’을 요구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선거제도 개혁을 외면한 개혁입법연대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은 찬성 입장을 나타냈지만, 은산분리 등 규제개혁과 이정미 대표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원 배제 등을 둘러싸고 민주당과의 찰떡 공조에 금이 가고 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이에 대해 “여권의 장기집권론은 협치 중심보다는 국민들에게 직접 평가를 받겠다는 정면 돌파의 성격이 짙다”며 “이 대표가 ‘도 아니면 모’라는 이해찬식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집권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협치’를 내세웠을 뿐, 속살은 전략적 유연성을 앞세운 ‘민주당 독자노선’이라는 얘기다. 정의당 한 관계자도 “개혁입법연대도 개헌과 선거구제개편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와 함께 치르겠다던 당·청의 4년 연임제 개헌도 끝내 실패했다.
여야 간극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민주당의 개혁입법연대 대상인 평화당은 정동영호 출범으로 사실상 제3당 지위 유지를 골자로 하는 ‘독자노선’을 택했다. 정 대표가 “선거구제 개편이 5당 대표 회담 의제가 돼야 한다”고 못 박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정의당의 최대 숙원도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구제 개편이다. 반면 이 대표는 그간 “선거구제 개편과 개헌은 연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진영 관계자는 “블랙홀 이슈인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연동하는 순간,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선거구제 개편으로 민주당이 TK를 탈환하는 것보다 호남 기득권을 잃는 게 더 크다는 점도 민주당이 선거구제 개편에 소극적인 이유로 꼽힌다.
난관은 이뿐만이 아니다. 당·청 지지율에 적색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는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도는’ 참여정부의 전철을 밟고 있다. 당내에선 은산분리 등 규제혁신 5법을 둘러싸고 매파(강경파)와 비둘기파(온건파)가 충돌했다. 당 밖에선 정동영 평화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의 우클릭 행보에 대해 “개혁의지가 실종됐다”며 차별화를 시도했다. 문 대통령은 ‘김앤장’(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갈등설 국면에선 소득주도성장론에 힘을 실어줬다. 당 안팎에선 “정부정책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사이 각종 경제지표는 바닥을 치고 있다. 올해 1월 33만 4000명 수준이던 신규 취업자 수는 7월 5000명으로 급락했다. 통계청의 ‘2018년 2분기 소득 부문 가계동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질 처분 가능 소득은 지난해 대비 0.1% 줄어 7분기 연속 줄어들었다. 이 대표가 취임 후 1호 과제로 ‘민생경제 연석회의’ 구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성과는 낼지는 미지수다.
당·청이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기다리는 것은 ‘내부 위기’다. 이 대표가 추미애 전 대표와는 달리, 고위 당·정·청 회의까지 주도하면서 ‘당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당내 반발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야권 한 관계자는 “이해찬호의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당내 의원들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지만, 그만큼 소통이 안 된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야권 일각에서 이해찬호 출범을 반기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야권 한 의원은 “보수대통합 등 야권 발 정계개편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 평론가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과반 이하로 떨어질 경우 당·청 관계나 야권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
‘눈빛만 봐도 척척…시너지냐 역효과냐’ 이해찬·홍영표 투톱의 미래 더불어민주당이 ‘이해찬(당 대표)·홍영표(원내대표)’ 원투펀치를 형성했다. 이 대표는 친노(친노무현)계의 좌장·친문(친문재인)계의 원로다. 홍 원내대표는 친문 직계로 통한다. 당내 김태년·윤호중 의원 등과 함께 대표적인 ‘이해찬 사단’으로도 분류된다. 당 관계자는 이 둘의 관계를 ‘바늘과 실’에 비유했다. 홍 원내대표는 참여정부 때인 2004년 이 대표가 국무총리로 재직할 때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냈다. 그는 2012년 민주통합당 이해찬 당 대표 시절에도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직을 맡았다. 이·홍 조합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친문계 내부에선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꿰뚫지 않겠느냐”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 관계자는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정책이나 노선 등을 놓고 갈등을 빚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땐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과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의원이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 대표와 홍 원내대표는 정국 화약고인 은산분리, 경제실정론에서 각각 ‘규제완화’, ‘보수정권 책임론’ 등으로 입장을 같이했다. 일각에선 친문 강화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대표는 전당대회 다음 날인 8월 26일 김태년 정책위의장을 유임시키고 비서실장에 6·13 재보궐을 통해 입성한 김성환 의원을 기용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인 김 의원도 ‘이해찬 사람’으로 통한다. 당 대변인에는 초선 이재정 의원과 이해식 전 강동구청장이 각각 선임됐다. 이해식 신임 대변인도 이 대표 측근이다. 이해찬 사단은 이뿐만이 아니다. 재야 민주화운동조직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인사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노영민 주중대사 등이 대표적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한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 출신으로는 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김현 전 대변인 등이 있다. 이 대표는 민통련 총무국장, 평민연 소장 출신이다. 민주통합당은 6년 전 18대 대선을 앞두고 ‘이해찬(당 대표)·박지원(원내대표)’ 원투펀치를 내세운 바 있다. 같은 계파는 아니었지만, 민주정부 1기와 2기 실세가 만나면서 최강의 조합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당 내부에서 이·박 담합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개혁파 의원들은 “당에 필요한 것은 담합이 아니라 ‘단합’”이라고 맹비난했다. 당 밖에선 2선 후퇴 압박을 받았다. 이들은 대선 막판 중앙무대가 아니라 충청과 호남 등 지역 활동에 국한하는 하방정치에 머물렀다. 환상의 복식조로 불리던 이들은 결국 201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