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정현 씨의 남편 지 아무개 씨는 서울 삼성의료원 앞에서 시신 사진이 붙여진 트럭을 세워두고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아내가 병원에 오기 전까진 참 건강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게 믿기지 않는다. 아내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삼성의료원의 반성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시위는 계속할 것이다. 청와대 앞에도 가고 국민권익위 앞에도 가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갈 것이다.”
8월 29일 오후, 서울 삼성의료원 앞에서 시신 사진을 붙인 트럭을 세워두고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사업가 지 아무개 씨(79)를 만났다. 그는 아내 신 씨가 사망한 지난 8월 7일 이후 매일 오전 8~9시부터 오후 6시까지 1인 시위를 한다. 인근 모텔에서 숙박하거나 대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날 다시 서울로 오는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지 씨는 지난 6월 부인 신 씨가 대구 계명대병원에서 췌장암 증상 소견을 받고, 같은 달 서울 삼성의료원으로 왔다고 말했다. 췌장암 1기 판정을 받았지만 간단한 수술로 회복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믿었다. 수술은 7월 19일 진행됐다.
그런데 수술 다음 날 신 씨에게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런 출혈로 인한 저혈량 쇼크와 패혈성 쇼크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이로 인해 대량으로 수혈 주사를 맞았지만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주사로 인해 오히려 온몸에 멍이 드는 증상이 나타났으며 혼수상태가 이어졌다.
수술 후 약 20일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신 씨는 결국 지난 8월 7일 사망했다. 삼성의료원 측에서 밝힌 사망 원인은 복강 내 출혈, 다발성장기손상, 저혈량 쇼크 등으로 알려졌다. 간단한 수술로 회복도 금방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 달리 수술 직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사망에 이른 결과에 지 씨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고 신정현 씨의 남편 지 아무개 씨는 서울 삼성의료원 앞에서 시신 사진이 붙여진 트럭을 세워두고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일요신문’에서도 삼성의료원에 정확한 사인과 급격한 상태 악화 등 신 씨의 사망과 관련해 문의했다. 삼성의료원 측은 “보호자와의 수차례 면담에 성실히 응했으며, 의료사고 여부는 의료분쟁위원회 등 공적인 절차를 통해 진행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며 “병원의 책임이 있다면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지 씨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아내를 다시 살려내라는 것 하나뿐”이라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안다. 분명한 의료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누구도 아내의 사망 원인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그 대신 내게 뭘 원하느냐고 묻는 병원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다”고 격분했다. 그리곤 “굳이 삼성의료원이 돈을 주려 한다면 그 돈을 모두 미스코리아협회에 기증하거나 아내 이름으로 미스코리아 장학재단을 만들 거다. 그렇게라도 아내가 기억되게 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1964년 제 8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의 영예를 안은 신정현 씨. 사진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
지금은 미스코리아가 연예인 데뷔의 디딤돌로만 여겨지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전혀 다른 의미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미스코리아는 단순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을 의미했다. 게다가 고인의 부친은 유력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집안의 장녀로 미스코리아 진의 자리에 오른 신 씨는 당연히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미스코리아 진이 되고 3년 뒤인 1967년 신 씨는 결혼식을 올린다. 상대는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동아건설 집안의 장남 최영택 씨였다.
고 동아그룹 최준문 창업주의 장남 최영택 씨는 20대 중반인 1966년 동아콘크리트 사장이 되는 등 한창 경영 수업을 받고 있었다. 당시 동아건설은 동진강 간척공사, 왕십리발전소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대기업으로 성장 중이었다. 1968년에는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통운 인수에 성공하면서 동아그룹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정치인 집안의 딸로 태어나 미스코리아 진에 올랐고, 마침내 재벌가의 며느리가 된 신 씨의 삶은 뭇 여성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신 씨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도, 오래가지도 못했다.
결혼 2년 뒤인 1969년 11월, 신 씨는 남편 최영택 씨와 영화배우 김혜정을 서울지검에 간통죄로 고소했다. 당시 소장에는 서울 성동구 약수동에서 최 씨와 김혜정이 동거 중이라는 주장도 담겨 있었다.
언론 자료 등에 따르면 신 씨의 간통 고소 소식이 보도되자 김혜정 측은 이를 부인했다. 그렇지만 몇 달 뒤 김혜정은 최영택 씨의 아이를 출산했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다. 간통죄 고소로 신 씨는 이미 최영택 씨와의 혼인 관계를 정리한 뒤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최영택 씨는 누구일까. 그는 바로 동아그룹 전 회장이자 현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이사장인 최원석 씨다. 최 전 부회장의 본래 이름은 최영택이지만 1974년 즈음 최원석으로 개명했다. 이런 까닭에 당시 언론 보도에는 ‘최영택’이라는 이름과 고 신정현 씨의 본명인 ‘신영태’라는 이름만 거론돼 있다.
이후 최원석 전 회장은 배우 김혜정과 이혼하고 펄 시스터즈 출신 가수 배인순과 재혼했지만 또 한 번 이혼한다. 1999년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장은영과 세 번째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생활 역시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최 전 회장의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가 개명하기 전에 이뤄진 첫 번째 결혼과 이혼은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 씨는 부인에게 들은 당시 얘기를 들려줬다. “아내가 당시 남편과 배우 김혜정의 간통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해 이혼을 요구하며 친정으로 돌아갔다. 시아버지가 이혼만은 말아달라며 말렸지만 아내가 끝내 거절했다”라며 “아무리 재벌 집안이라고 해도 당시 유력 정치인이던 장인 집안의 세를 무시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혼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신 씨는 한국을 떠나 주로 미국에서 지냈다. 1980년대 초 지금의 남편인 지 씨를 만나 재혼했고, 이후 평범한 삶을 이어왔다. 지 씨는 “피차 재혼의 처지였기에 사이는 더욱 돈독할 수밖에 없었다”고 결혼 생활을 회상했다. 사업가인 남편을 내조하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미스코리아 관련 사회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해왔다.
반면 최 전 회장은 세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격렬했던 가족분쟁을 겪었다. 동아그룹이 해체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이처럼 최 전 회장이 계속 화제와 뉴스의 중심에 서 있었던 데 반해 재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신 씨의 존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아내가 내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모른다. 아내가 죽고 난 뒤 화장했지만 아직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화장한 재가 아직도 집에 있다. 아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아직 지 씨는 부인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고령으로 무더운 날씨 속에서 외로운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미코 배우 가수 아나와…’ 최원석 전 회장 혼인사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이다. 세 번이라는 횟수도 중요하지만 더욱 화제가 집중된 까닭은 세 명의 전처가 모두 연예인 내지는 방송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를 둘러싼 구설수와 루머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보다 먼저 최 전 회장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본처의 존재가 드러났다. 바로 제8회 미스코리아 진 신정현 씨다. 따라서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그 배경에 바로 본처 신정현 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으로 유력 정치인의 딸인 신 씨를 최 전 회장의 부친 고 최준문 동아그룹 창업주가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그런데 최 전 회장이 배우 김혜정과 동거를 시작해 결국 며느리이던 신 씨가 간통 소송을 제기하자 최 창업주가 이혼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신 씨를 설득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김혜정과의 결혼에 대한 반대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혜정과 이혼하고 2년 만에 최 전 회장은 재혼한다. 상대는 펄 시스터즈 출신 인기 가수였던 배인순이다. 배인순과는 22년이나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아들 3명을 낳았지만 결국 1998년 이혼했다. 이혼 과정에서 각종 구설수가 이어졌다. 당시 최 전 회장은 배인순이 한 기업인과 승용차를 타고가다 사고가 나자 “배우자가 외도했다”며 이혼을 주장했다. 그런데 3년 뒤 검찰 조사에서 외도 주장이 최 전 회장 계열사 직원의 사주를 받은 사람의 무고에서 비롯됐음이 밝혀졌다. 이후 배인순은 최 전 회장의 여성편력을 낱낱이 고발하는 자전적 소설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한잔’을 내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1999년 8월 15일자에 최원석 전 회장과 아나운서 장은영 씨가 결혼식 없이 몰래 혼인신고한 사실을 특종보도했다. 혼외자식도 있다. 최 전 회장이 스무 살 때 한 여배우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선희 씨가 바로 그 주인공. 선희 씨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인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 재찬 씨와 결혼했지만 이후 새한그룹이 몰락하고 남편 재찬 씨는 자살한다. 이후 선희 씨가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1000억 원대의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