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의 천상병 시인(오른쪽)과 부인 목순옥 여사.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했던 천 시인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천원만”하며 손을 벌리곤 했는데 후에 ‘동백림사건’에 연루되면서 이것이 공갈죄로 ‘둔갑’했다. | ||
나는 1997년 5월부터 몇 달 동안 [일요신문]에 ‘정치재판의 현장에서’란 제하에 내가 변호했던 중요한 시국사건 51건을 추려서 연성(軟性)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 다시 연재하는 ‘시국사건 재판의 현장’은 말하자면 그 속편이라 하겠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일어난 억압과 저항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남북의 분단과 그것을 빌미로 한 독재와 편견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만한 민주사회를 이룩하기까지의 숱한 곡절 가운데 이른바 ‘시국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좀 더 기억하고 음미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지난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 또한 과거에 뿌리를 둔 결과라는 상식을 되살리지 않더라도 한 시대의 아픔이 담긴 지난날의 사건들을 되새겨보는 이런 작업은 그것대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는다.
▲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한승헌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 ||
그의 이름 때문에 생전에도 ‘천상(天上)의 시인’으로 불렸던 천상병 시인, 순박하면서도 잦은 기인행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귀천’(歸天)이란 명시를 이 세상에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서 더욱 유명해졌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거점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의 피의자 명단에 바로 그 ‘천상병’이란 이름 석 자가 끼어 있어서 세인을 놀라게 했다. 천 시인에게 무슨 용공사건에 연루될 만한 사정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백림사건’이란 유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문화 예술인, 학자, 유학생, 지식인들이 (당시 분단 독일의) 동백림에 가서 북한 공관원들과 접촉, 반국가적 행위를 하였다는 것으로, 구속 기소된 피고인만 34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 작곡가 윤이상, 서베를린대학 박사과정 임석훈, 화가 이응노, 농업문제 전문가 주석균 등의 이름이 한층 주목을 받았다.
나는 그 중 이응노 화백의 변호를 맡아서 서울구치소 접견을 다니고 있었는데, 천 시인만 변호인이 없었는 데다 밖에서 누구 접견 올 사람도 없는 듯해서 내가 변호를 자청했다. 문단 행사나 문인들의 이런저런 모임에서 그와 나는 서로 잘 아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조금도 생소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가 서울상대(商大)를 다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학벌을 짐작치 못했을 것이다. 천 시인 본인의 말인즉 여러 학과를 따로 적은 종이쪽지를 허공에 던져서 가장 멀리 날아간 대학을 택한 것이 서울상대였다. 바로 그 상대 친구의 한 사람인 강빈구씨(당시 서울대 조교수) 역시 동백림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와의 관계가 혐의사실의 단서를 이루고 있었다.
공소장대로라면, 사건이 터지기 4년 전인 1963년 10월 초순 어느 날 저녁, 그는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뒷골목에 있는 대포집에서 강빈구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강씨가 자신이 동독과 동백림 등 적성국을 왕래하였으며 난수표와 출판사 이야기를 하면서, 여의치 않으면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동독에 갈 생각이 없느냐는 권유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범죄라고 공소장에 들어가 있는가―하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공소장에 따르면, 그것은 “동인(강빈구)이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구성원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암약중인 간첩이라는 점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치 아니하고…”라고 해서, 말하자면 반공법상의 불고지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참 무서운 법이었다.
그뿐인가, 반공법 말고 형법상의 공갈죄가 얹혀 있어서 더욱이나 뜻밖이었다. 그것도 친구인 강빈구씨를 상대로 협박을 하고 갈취를 했다니 파렴치범처럼 되어버렸다.
공소사실은 이러했다. 1965년 10월 중순 어느 날 낮, 강씨 집에 가서 중앙정보부에서 자기더러 동독 갔다 온 사람을 대라고 해서 난처하다는 취지로 강씨를 협박했다는 것. 그리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하여 동인에게 금 2만원만 주면 무마시켜주겠다고 금품을 요구, 동인으로부터 금 6천5백원을 교부받아 이를 갈취하고…”라고 적혀 있었다.
공소사실 제3항은 또 이러했다. “그시경부터 1967년 6월25일까지 사이에 같은 방법으로 동인을 협박, 동인으로부터 1주일에 1, 2회씩 서울 명동 소재 금문다방, 송원기원 등지에서 주대 1백원 내지 5백원씩 도합 금 3만원가량을 교부받아 이를 갈취하고….”
절친한 대학 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2년 동안 매주 1, 2회씩 처음엔 6천5백원을, 그 다음엔 1백원 내지 5백원씩 갈취했다는 것이다. 2년도 채 안되는 동안 매주 한두 번씩 상습적으로 뜯어낸 돈의 합계가 3만6천5백원이라? 간첩 신고 협박에 1백원씩, 많아야 5백원을 갈취했다? 이것은 코미디였다.
나는 천 시인이 강 교수로부터 그만한 액수의 돈을 받았으리라는 점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천 시인은 누구에게나 악의 없이 손을 내밀고 “천원만”을 버릇처럼 되뇌곤 했으니까.
학벌이 좋고 문재(文才)가 뛰어났음에도 그는 가진 것 없이 헐벗어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손을 내밀곤 했던 것이다. 시인 이근배씨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참 후배인 나도 그의 수금처가 되어 거의 정기적인 내방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찾아왔다가 내가 자리에 없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김소운 수필집 <하늘 끝에 살아도>를 들고 갔더란다. 헌 책방에 넘길 양으로 들고 갔던 것을 첫 장을 읽다가 그만 오전 2시까지 독파했노라고 털어놓기도 했다”는 것. 또 다른 문인 한 사람도 천 시인은 일생동안 악한 일 한 번 못하고 코흘리개 아이들과 같은 천진스런 행동으로 고작 한다는 짓이 손 내밀고 “나 천원” “괜찮아, 다 괜찮아”란 말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바로 이런 그의 언행 기벽을 아는 사람은 그가 강빈구씨한테서 1백원, 5백원을 거푸 얻어 쓴 것을 금방 이해하고 “또 수금을 했구나”하고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법정은 그런 것조차도 모두 공갈죄로 처벌했다. 징역 1년에 3년 집행유예―그런 식의 재판에 더 기대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천 시인은 항소도 하지 않았다.
‘남산’에 끌려갔을 때 받은 전기고문의 후유증에다 영양실조까지 겹친 그는 길거리를 헤매야 했고, 한때 소재불명이 되기도 했다. 그가 서울 응암동에 있는 시립병원에 행려병자로 강제 입원중일 때,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밖의 문우들이 <새>라는 제호가 붙은 ‘유고시집’을 낸 비화도 있다.
아주 고생스러울 때 만난 아내 목순옥 여사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술을 주식처럼 즐기며 살아가던 그는 1993년 4월28일 홀연히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원한 그의 아내인 목 여사는 지금도 인사동 골목에 ‘귀천’이란 찻집을 차려놓고, 남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작품과 유품들과 더불어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왼쪽)는 검찰측 감정인까지 마 교수에 유리한 의견을 냈지만 결국 패소했다. | ||
1992년 10월29일, 소설 [즐거운 사라]의 작자 마광수 교수(연세대)가 검찰에 연행된 다음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 사라>가 형법 제244조의 음란문서에 해당된다는 혐의였다. 그동안 사문화되었거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 조문이 난데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철퇴를 휘두른 것이다.
작품의 음란 시비 때문에 작가가 구속까지 된 예는 거의 없었다. 형벌(법정형)도 1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벼운 편이어서 모두가 불구속이었다. 그런데 [… 사라]의 경우는 달랐다. 그 소설책을 펴낸 청하출판사 장석주 사장까지도 구속했다.
검찰은 <즐거운 사라>를 변태적 성행위를 묘사해놓은 퇴폐적인 소설이라며 스스로 문학이기를 포기한 도색작품으로 몰았다. 법적으로 보자면, [… 사라]는 “성욕을 자극·흥분시키고 일반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도의관념을 해치는” 음란소설이라는 것. 그러나 ‘남녀 사이의 정사장면을 묘사한 소설이라고 해서 이를 곧 반사회적 범죄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강했다. 음란 내지 음란문서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 급변하는 개방사회의 성윤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성적 묘사를 곧 성풍속에 관한 범죄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법원에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하고, 성문제를 픽션으로 다룬 작품을 윤리·도덕에 어긋난다고 해서 형사법 차원에서 단죄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특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각’이었다. 기소된 후에 낸 보석 청구도 역시 기각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현직 대학교수를 구속까지 해놓고 재판하는 데 대한 학교 안팎의 비난은 묵살되었다.
마 교수는 법정에서 문학을 법의 잣대로 잰다는 일 자체의 부당함과 구속 수사라는 극한적 방식이 표현의 자유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또 문제된 작품은 무분별한 성의 탈선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한 카타르시스 내지 대리배설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항변했다.
언론을 중심으로 한 사회각계의 공론은 찬반 양론으로 갈리어 논란이 벌어졌지만, 그 해 12월28일 재판부는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8월에 2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심에서는 시일이 많이 걸리는 감정을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구속 상태를 벗어나야겠다는 전략 아래 간략하게 심리를 끝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항소심에서는 당연히 작품에 대한 감정을 신청하는 등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법원은 민용태(고려대 교수), 하일지(작가) 두 사람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 사라]에는 음란성이 없다는 취지의 공동의견이 나왔다. 법정에서는 검찰측 신청의 감정인 민용태 교수와 담당 검사가 언성을 높이며 설전을 벌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검찰이 신청한 감정인조차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감정의견을 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나리라는 전망이 유력해졌다. 그러자 재판부는 이상하게도 검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서울법대의 안경환 교수를 새로운 감정인으로 선정했고, 안 교수는 [… 사라]가 문학작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이라는 감정의견을 내놓았다. 천만 뜻밖이었다.
결국 2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이 사건 소설은 앞서 살핀 음란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으로서 형법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성풍속이나 건전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음란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나는 최종 변론 때에 좀 감성적인 공세를 시도했다. 즉 “무릇 음란물이 되자면 우선 사람의 성욕을 자극 흥분시키는 것이 첫째 요건인데, 단상의 재판관 중에 이 소설을 읽고 성적으로 흥분하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고로 무죄판결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유죄가 선고되자 주변에서 누군가 말했다. “요즘 판사들이 너무 젊어서 그 정도에도 흥분을 하신 모양이다.”
나는 상고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사건은 하급심에서 무죄가 났더라도 대법원에 가면 그 보수성 때문에 유죄로 뒤집힐 위험이 있는데, 하물며 1, 2심 모두 유죄가 난 마당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될 가망은 없다고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대법원은 기대해볼 만하니 상고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이유인즉 이러했다. “그래도 대법관들은 나이가 좀 많으니, 그리 쉽게 흥분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물론 그건 웃는 이야기였고, 나는 최종심의 올바른 판결을 염원하면서 상고이유서를 정성껏 써냈다. 마 교수 자신도 장문의 상고이유보충서를 통하여 항소심 유죄판결의 오류를 조리있게 해부·논증했다.음란문서 판매죄로 작가와 함께 재판을 받은 장석주씨도 시인이자 평론가답게 검찰과 치열하게 논전을 벌였고 강력한 자기방어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혹시나’ 했던 상고심 판결은 ‘역시나’로 끝났다.
소설에 대한 문학 논쟁이나 윤리적 평가야 자유겠으나, “성 묘사는 퇴폐 음란이요, 반윤리요, 그러니까 범죄다”라는 식의 유죄론은 참으로 위험하다. 더구나 국가가 하루아침에 윤리 도덕의 수호신이 되어, 음란한 성 묘사는 예술이 아니니까 법의 보호대상이 아닌 범죄라고 한다면, 결국 작품의 예술성 유무를 국가권력인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애지중지하는 ‘음란’ 개념이란 1951년의 일본 판례를 복사한 것이고, 그 판례는 1918년 다이쇼(大正)시대의 판결에 뿌리를 둔 것인즉, [… 사라]에 대한 유죄는 재판 당시 88세 된 노인이 태어날 때, 그리고 1백세가 넘은 초장수 노인이 사춘기였을 때의 성 풍속을 다스리던 판례를 한국 사회에 들이댄 것이었다.
[… 사라]의 일어판이 바로 그런 판례의 원산지인 일본에서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고 10만 부나 팔렸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