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20일, <중앙일보> 대전 주재 박영수(일명 영구) 기자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중앙일보> 전날 치에 실린 ‘권총 지닌 여인 음독’이란 제목의 기사가 화근이었다. 그 기사에는 ‘거리서 기절, 주민 신고로 입원’ ‘난수표와 가명 쓴 증명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구속 사유인즉, “여간첩이 검거된 사실을 신문지상에 보도하면, 다른 간첩 검거에 곧 지장이 오고, 나아가서는 간접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북괴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서도… 본사에 송고, …여자 간첩용의자 검거 기사를 4단으로 보도함으로써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다”(구속영장)라는 것. <중앙일보> 본사의 김천수 사회부장, 지방부 남상찬 기자도 두 번이나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이 사태를 조사한 한국기자협회 조사단은 사전에 적절한 ‘보도관제’를 요청하지 않은 관계당국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 보고서는 “대간첩 관계 기사에 관한 한, 신문·방송·통신이 100% 이상 당국에 협조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사건이 발생하면 사전에 기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보도 보류를 요청하는 자세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했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1971년 7월18일 이른 아침, 대전 시내의 중심가 도로 위에서 35세가량의 여자가 극약을 먹고 비틀거리는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충남도립병원에 입원시킨 그 여자의 몸에서 권총 1정, 난수표(길이 3m), 사진만 같고 각각 이름이 다른 주민등록증 3장, 현금 50만원이 나와서 경찰을 긴장시켰다.
박영수 기자는 사건 발생 당일에는 대전에 있지도 않았다. 그날 충남경찰국 출입기자들은 그 사건을 거의 다 알았으나 “간첩 관계 사건인 것 같으니 기사는 보내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다. 박 기자는 그 자리에 없었으나 나중에 다른 기자로부터 “기사화하지는 않고 다만 본사에 알리기만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도 이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다.
박 기자는 <서울신문> K기자가 본사에 정보사항으로 알려주는 통화내용을 들었는데, 정작 문제된 여인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그러자 민완기자의 본성과 수완(?)을 발휘하였으니, 충남경찰국으로 가서 경비전화로 중동파출소를 불러, 자신이 관계 간부인 양 가장하여 보고를 받는 형식으로 취재하는 데 성공했다.
<중앙일보>는 7월19일자 1판 7면에 이 기사를 내보냈으나 경찰의 요청에 따라 2판부터는 그 기사를 삭제했다.
검사의 공소사실 역시 “여간첩의 검거 사실을 취재, 본사에 송고함으로써 다른 간첩의 검거에 지장을 주는 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였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검사의 그런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 보도로 말미암아 다른 간첩의 검거에 지장을 주어서 이적행위가 되었다고 하려면, 그 여간첩이 다른 간첩과 언제 어디서 접선하려 했다는 점이 어느 정도 밝혀져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입증이 없다.
나는 변론에서, 1969년 11월7일 대구고등법원이 내린 세칭 <대구매일신문> ‘영덕 간첩 보도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세우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 사안인즉, ‘북의 간첩이 묻어둔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장비 및 소지품을 경찰이 발견하고 간첩 잡기에 나섰다’ 는 보도를 한 행위에 대해서(설령 당국의 보도관제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반공법 제4조 1항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그 사건에서는 무기가 묻혀 있는 지점에 간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데다가 수사당국의 보도관제 요청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법원은 “고의적으로 대남 간첩공작을 와해시켜 간첩 체포를 모면케 하여 북괴의 간첩활동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당국이 공작상 필요할 때 활용하는 보도관제 요청이 이 사건의 경우에는 있지도 않았으니 박 기자로서는 자기의 취재 보도가 대간첩작전에 해를 미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 기자는 이 사건과 같은 간첩 체포 기사는 주민의 신속한 신고를 장려하고 간첩 침투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주는 등의 이점도 있다고 진술했다.
나는 한국기자협회 창립 때부터 고문변호사로서, 보도의 자유와 기자들의 권익 옹호에 얼마간의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런 인연과 직분으로 해서 기자협회의 변호 의뢰를 받고 대전에 왕래하면서 변론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 기자는 10월22일 보석으로 석방된 후, 11월4일의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 흰 수의를 입은 고준환 동아일보 기자가 재판에 나와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1심 판결 후 항소해 사건화된 지 7년 만에 그는 무죄가 됐다. 동아일보 | ||
<동아일보> 방송뉴스부 고준환 기자는 1971년경부터 법조 출입을 하며 취재활동을 해왔다. 그는 제9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검찰에서 전(前) 국회의원 등 79명을 사전선거운동(사전 조직 점검, 금품수수) 혐의로 내사하고 있는데, 금명간 이들이 구속될 것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취재, 방송뉴스로 내보냈다. 1973년 1월31일 오후의 일이었다.
바로 이 뉴스의 취재·보도가 ‘선거에 관한 허위보도’, ‘사전선거운동 혐의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된다 하여 서울지검 공안부가 그를 구속 기소했다. 나는 한국기자협회의 의뢰에 따라 고 기자의 변론활동에 나섰다.
방송된 내용에는, “…신민당 소속 송원영씨 등 79명이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되어 오늘과 내일 사이에 구속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늘 대검찰청에 따르면, 사전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되어 있는 전직 국회의원 79명 가운데는, 공화당 소속으로 차형근, 유범수씨와 채영석씨가 들어 있고, 신민당 소속으로는 송원영씨, 김원만씨, 유옥우씨 등이 들어 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어서, 입건된 의원들의 실명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고준환 기자는 재판과정에서 취재 경위와 보도 내용은 대체로 시인하면서도 허위보도로 선거의 공정을 해치거나 정치인들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우선, 보도 중에 내사(內査)사실 및 그 대상인원 수가 허위가 아니었다. 이 점은 대검찰청 검찰사무과장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설령 검찰이 내사당사자들을 입건 또는 구속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피고인에게 ‘허위’에 따르는 형사처벌을 가할 수는 없다. 고 기자의 보도는 어디까지나 “오늘과 내일 사이에 구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전망기사였다. 따라서 기사의 작성·송고 당시에 그런 판단을 할 만했던 합리적 증좌가 있었다면, 사후에 그대로 적중되지 않았다고 해서 허위보도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사단계에 있는 사람을 입건되었다고 한 것이 허위 아니냐’는 추궁도 있었다. 그러나 내사나 입건이나 어떤 혐의가 있어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수사기관 내부의 처리방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했다고 해서 이를 범죄로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적용 법조로 내세운 국회의원선거법 제64조에 보면, ‘방송사업을 관리하는 자’만을 규제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고 기자는 방송뉴스부의 기자이기 때문에 위 규정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뉴스의 방송은 선거운동기간 전의 보도 즉 후보 등록이 시작되기 전의 행위이므로 ‘선거법상의 후보자’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전선거운동 혐의자에 대한 후보등록 전 보도는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또한 공명선거를 계도하는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한 행위란 점에서도 명예훼손의 책임이 부정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1심 판결은 ‘무죄’가 아니라 징역 8월에 2년간 집행유예였다. 나는 재판에서 주장한 ‘무죄론’을 항소이유로 재구성하여 2심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모두 ‘이유 없다’고 기각되었다. 다만 피고인의 취재 경위와 동기 등 제반사정과 피해자들이 피고인의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 점을 들어 형의 선고유예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대법원(주심 민문기 대법관)은 1978년 11월 원심을 파기하여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항소심에서는 1980년 10월23일 변호인의 항소이유를 인정하여 무죄를 선고하였으며, 그 판결은 검찰이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그대로 확정되었다. 무죄이유는 ⓛ문제의 방송은 선거일 공고 전(따라서 입후보 등록 전)에 있었으므로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②명예훼손의 점은 그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인식 즉 범의가 없었다는 요지였다.
처음 사건화된 때로 치면 7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으니 ‘진실보도의 승리’를 기뻐하기는 너무도 때늦은 매듭이었다.왜 그런 억지 구속, 억지 유죄판결이 나왔을까. 당시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박정희정권은 5·16쿠데타세력의 본성을 발휘하여 국민의 반독재저항을 탄압 일변도로 억누르다가 그것도 한계를 보이자 1972년 10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난데없는 ‘10월 유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헌정은 중단되고 국회 아닌 비상국무회의가 만든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공포했다.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선거 아닌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데서 간접선거를 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장치를 완비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인 1973년 1월23일 박정희씨는 통대에서 사전 각본대로 대통령에 ‘선출’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반 헌법적 정치쇼가 벌어진 지 1주일 만에 바로 고준환 기자의 구속사건이 벌어졌으니, 사건의 배경이나 이면의 노림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때 비판적 입장을 취하던 기자들이 <동아일보>, 동아방송에 많이 있었고 보면 의혹은 쉽게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