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급조치 1호 사건으로 군사법정에 선 성직자들. 오른쪽부터 김진홍, 이해학, 이규상, 인명진씨. | ||
5·16쿠데타로 불법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는 3선 개헌까지 감행하면서 장기집권을 하다가 마침내는 소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헌정을 파괴한다. 1972년 10월의 일이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의 저항이 거세어지던 끝에 73년 말경에는 ‘유신헌법철폐 1백만인 서명운동’이 전개된다. 이에 호응·참여하는 전국적인 열기가 격렬한 정권 퇴진운동으로 번지자 박 정권은 난데없이 ‘대통령긴급조치’라는 것을 선포한다. 유신헌법 반대·개정운동을 15년 징역으로 다스린다는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법률로도 못할 짓을 대통령 명령으로 막겠다는 이 조치의 처벌대상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였다.
그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개헌서명운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장준하, 백기완 두 분이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의 제1호로 구속되었다. 그들은 전해 성탄절 전날 함석헌, 천관우, 김동길, 계훈제 등 각계 민주인사들과 함께 서울 YMCA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1백만인서명운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피고인은 김진홍(당시 32세·활빈교회 전도사), 이해학(29·성남 주민교회 전도사), 이규상(34·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전도사), 인명진(29·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 백윤수(29·창현교회 전도사), 김경락(36·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중앙교회 목사) 등 기독교(개신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공소장 첫머리에는 “…북한 공산주의집단의 남침 야욕에 대처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국력의 배양과 국민의 총화단결이 요청되고 있어 1972. 10. 27.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유신헌법을 국민총의로 탄생시켜 우리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안정과 번영 및 평화통일의 기틀을 굳게 다져가고 있는 이때에, 이를 망각하여 유신체제를 뒤엎고 국력을 약화시키려는 몰지각한 일부 인사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1974. 1. 8. …대통령긴급조치가 선포되었으므로 동 조치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됨에도 불구하고 …”라고 장황한 정치적 넋두리를 늘어놓음으로써 독재정권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피고인들은 위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독재적인 조치라고 그릇 판단한 나머지 동 조치에 항거할 것을 기도하고 있던 차 …”라는 대목에선 ‘그릇’만 빼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만했다.
이들의 긴급조치 위반행위를 주도한 사람은 김진홍(현 두레교회 목사)·이해학(현 성남주민교회 목사) 두 사람으로 공소장에 지목되어 있다. 위 두 사람은 긴급조치가 나온 지 이틀 뒤인 1974년 1월10일, 긴급조치 철회와 개헌청원서명운동 허용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한다. 이어서 김경락, 인명진, 이규상, 박윤수 등을 순차로 만나 시국기도회 개최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받았다.
이들은 김재준 목사를 시국기도회장으로 추대하고 범교회적으로 고문을 위촉한다. 그러나 명망있는 목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국기도회 개최 장소를 물색하고자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들은 여러모로 궁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1월17일 오전 10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 위 6인이 예고 없이 들어가 총무인 김관석 목사를 동석시킨 가운데 김경락 전도사 사회로 ‘1·8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열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대통령의 1·8긴급조치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는 등 3개 항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참가자 모두가 개헌청원 서명록에 서명을 했다. 이어서 그 건물 내에 있는 기독교의 여러 기관·단체를 찾아가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배포하고 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헌법을 반대, 헌법 개정을 청원, 이를 권유하고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한 것”으로 단죄되는 판국이었다. ‘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한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조항까지 포함돼 있었으니, 독재정권의 입법하수인들이 보인 치밀한 충성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진홍과 이해학 두 사람은 중앙정보부 조사에서 서로 자기가 주동자라고 우겼다. 이에 조사관들이 당혹스러워하다가 (달필이라서) 플래카드와 선언문의 글씨를 쓴 김진홍을 주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서울 삼각지의 국방부 청사 뒤에 있는 퀀셋법정에서 열렸다. 단상에는 재판장 육군중장 박희동, 심판관으로 육군소장 신현수, 판사 박천식, 검사 김태원, 법무사 육군 중령 김영범 등 5인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단하의 피고인들은 오히려 당당한 목소리로 유신통치와 긴급조치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법정 분위기를 지배했다.
심판관석의 군인(장성)이 피고인들에게 질문 아닌 시비를 걸었다. “이 비상사태에 목사·전도사들이 전도는 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
단하의 성직자들은 즉각 답변 아닌 역습을 했다.
“이 비상사태하에서 당신들 군인이야말로 국방은 하지 않고 왜 여기 와서 재판을 한다고 앉아 있는가.”
피고인들은 성서적 진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으로 유신통치와 긴급조치를 반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크리스찬의 사명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당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변론을 하기 위하여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펼쳐놓고 소나기식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질문이나 변론에 써먹을 내용이나 구절을 메모해 가지고 법정에 나가곤 했다.
그해 2월7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인명진, 박윤수(각 징역 10년)를 제외한 피고인 4명에게 각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이 떨어졌고 대법원까지 가서 그대로 확정되었다. 나는 긴급조치사건을 비롯하여 제법 많은 시국사건의 변호를 하는 가운데, 기독교인들의 양심과 정의감, 그리고 용기의 원천이 그들의 독실한 신앙에서 비롯됨을 알고, (변호인이 피고인들로부터 감염되어) 마침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 1974년 4월3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민청학련’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전경들이 서울대 의대로 들어서고 있다. [김천길 사진집 서울발 외신종합] | ||
1974년 4월3일 밤에 발표된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의 관련자를 처벌대상으로 하여 급조된 것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는 결석, 시험거부, 집단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 과할 수 있다는 기막힌 내용이었다.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사건 수사상황’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어마어마했다. 2백40여 명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 그러면서 학생 주모자들은 이른바 노동자 농민 정부를 세울 목적으로 과도적 통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까지 계획했다고 말했다.
5월27일 일본인 2명을 포함해 민청학련 관련자 55명이 1차로 기소된 것을 비롯하여 모두 1백8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6월15일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끌려 나온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황인성, 나병식, 윤한봉, 안재웅, 나상기, 서경석 등과 함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인 이직형씨의 얼굴도 보였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 총무는 “평소부터 유신헌법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며, 정부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국민의 의사를 1·8긴급조치라는 강제수단으로 억압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는 등 부당한 처사를 감행한다고 단정하여 이에 불만을 표시하여 오던 중…”이었다고 한다. 공소장 중에서 이 대목만은 매우 ‘정확’했다.
공소사실의 첫째는 “유신헌법을 반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 라병식 등의 폭력혁명계획을 격려했다”는 것. 라병식씨는 서울대생 이철, 유인태 등과 폭력혁명의 수단으로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교회 계통과의 연계책임을 담당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총무는 라씨로부터 자금 지원 요청을 받고 정상복을 통하여 5만원을 줌으로써 폭력혁명계획을 격려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유신헌법 반대는 맞지만 ‘정부 전복’이나 ‘폭력혁명’은 말조차 나온 적이 없었다. 앞서의 5만원은 무슨 혁명 거사자금이 아니라 일상적 비용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혐의는 대통령긴급조치 1호, 같은 긴급조치 4호 위반에 형법상의 내란예비음모라는 엄청난 죄명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다 뇌물죄까지 얹혀 있었으니, 그 사연은 이러했다.
이 총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첫날 저녁에 임아무개라는 담당 교도관이 주는 종이와 볼펜을 가지고 “아내에게 학생들이 집에 온 사실이 없다고 알려주라. 메모 전달인에게 돈 1만원을 주라”는 편지(속칭 비둘기)를 조아무개라는 KSCF간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조아무개로 하여금 돈 1만원을 교도관에게 뇌물로 주게 하였다는 것. 구치소에서는 흔히 “비둘기를 날린다”고 해서 교도관이 수감자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쪽지(편지)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는 일이 더러 있었다.
공소사실 세 번째는 민청학련 구성원인 라병식과 만난 사실 등을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하였다는 ‘불고지죄’였다. 이건 법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죄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총무를 비롯한 거의 모든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하여 허위자백을 했다고 호소하였는가 하면, 수명(受命) 법무사가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참여를 배제한 채 증인 신문을 하였고, 그밖에 유죄로 볼 만한 적법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군법회의는 1, 2심을 막론하고 유죄판결이었다. 내란음모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도 물론 없었다.
나는 변호인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상고이유서를 썼다. 대법원이라고 해서 별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법정에 선 청년·학생들이 결코 범죄자가 아니라 단상의 심판관들과 그들 상부의 군부 집권자들이 범죄인임을 밝혀두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월13일, 용산 삼각지에 있는 군법회의 막사에서는 저들의 각본대로 1심 판결이 나왔다.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사형과 무기징역을 면한 18명의 형기 합산연수가 3백40년이나 되었다. 구형량과 똑같은 선고형이 32명의 피고인 중에서 29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처럼 구형량에서 한 푼도 깎아주지 않는 판결에 ‘정찰제 판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이직형 총무(훗날 장로가 됨)는 서빙고의 보안사에서 군홧발로 짓이김을 당하고 의식을 잃기도 하였으며, C검사한테 조사를 받다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얼굴에 주먹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이 총무에게 1심에서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항소심에서는 피고인 전원이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다가 퇴장 당하기도 했고, 단상의 심판관들에 대해서 단하의 피고인들이 역습 공세를 취하자 ‘발언 제지’, ‘퇴장명령’ 등으로 법정 내에 소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심판부는 피고인을 전원 퇴장시킨 뒤 나보고 변론을 하라고 하기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나는 피고인들을 변호하러 여기 왔지, 빈 의자를 변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