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10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여정남씨와 함께 활동했던 학교 후배들과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운영위원들이 대구에 있는 여씨의 묘를 찾았다.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이가 여씨의 조카 여상화씨. 사진제공=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 ||
박정희 정권은 1인 영구집권용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4월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사건을 꾸며 군법회의에 걸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소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종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 연루자들은 모두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인혁당사건에서 7명과 민청학련사건에서 1명은 끝내 사형대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이라는 항의가 빗발쳤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하루도 채 안되는 20시간 만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의문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1975년 4월9일 새벽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02년 9월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고귀한 목숨과 그들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국가기관이 공식으로 조작사건임을 인정한 인혁당사건은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법살인’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형수 8명 중 민청학련그룹에 속한 피고인은 단 한 사람, 경북대학교 학생회장이던 여정남이었다. 그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으로 조작되어 사형까지 당했다. 바로 이 비운의 젊은이를 내가 변호했다.
1974년 새해가 밝자마자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유신반대에 나선 종교인, 지식인, 청년학생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일요신문> 2005년 1월16일자 제661호 18~19쪽 참조).
1월8일의 긴급조치 1호에 이어 4월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 관련자의 대량 검거에 나섰다. 그리고 그 달 25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이란 것을 발표했는데, 체포된 사람들은 주로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혁신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10년 전인 1964년 중앙정보부에 검거되어 이른바 ‘인민혁명당사건’으로 처벌된 바 있는데, 바로 그 인혁당을 재건해가지고 민청학련의 유신반대 운동을 배후 조종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 중 정상복, 이직형, 나상기, 서경석, 안재웅, 황인성 등 기독청년그룹과 유근일의 변호를 맡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 변론이 문제되어 강신옥 변호사가 구속되는 바람에 그가 맡았던 여정남의 변론을 내가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인혁당 재건위’ 쪽의 도예종(50·삼화건설 회장), 서도원(52·무직), 하재완(43·무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등과 함께 1심(1974. 7.13.)에서 이미 사형을 선고받고 난 뒤였다.
여정남은 경북고 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정외과 재학 중 1965년에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였고, 1971년의 ‘정진회’ 필화사건, 다음 해의 포고령위반 등으로 연달아 구속된 바 있었다.
그에 대한 1974년 사건의 혐의사실도 완전한 조작이었다. ‘북괴노동당 사업총화보고문’은 본 일조차 없는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게 했다든가, 이철, 유인태에게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든가,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느니 하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었다. 하재완과의 자금 수수관계,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지도부 구성과 학원조직책 담당 등 모두가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에 의해서 진술서나 각종 조서는 사전 시나리오대로 조작되었다. 여정남은 항소이유서에서 몸서리치는 고문 협박의 일면을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조사 때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고, 전기고문, 물고문, 심한 매질 등으로 몸이 극도로 피폐해져서 주사를 맞아가며 겨우 재판에 나왔다. 거기에다 법정 방청석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정보부원의 감시를 받으면서 재판을 받게 되어 공포와 위축감은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상군법회의라 한들 법이 있을 터인데 재판 진행이 법절차를 정면으로 무시한 채 위법하게 진행되었다. 조작사건이 아니라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억누르고 입을 막고, 재판절차를 무시하는 짓을 했을 리가 없다. 피고인측이 신청하는 증인은 모조리 기각하는가 하면, 재판장은 “긴급조치 1호에 따라 당 법정에서는 변호인들의 발언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위협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검찰측의 증인도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신문을 해버리고, 이에 대한 변호인의 이의 제기도 묵살했다. 군법회의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처사를 밥먹듯이 되풀이했다.
오죽하면 이 사건이 나중에 대법원에 올라가서 어이없이 기각되는 와중에서도,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판결문에다 밝혔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 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절차상의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참으로 소신과 용기가 있는 법관다운 의견이었다.
나는 이 사건 상고중인 1975년 3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내가 상고심을 맡은 여정남이 갇혀 있는 서울구치소 한지붕 밑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 원한의 1975년 4월9일 새벽,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0.75평짜리 감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 여정남군!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이 지난 95년 5월17일 15주년 기념 모임을 가졌다. 아랫줄 가운데가 김대중 전 대통령,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다. | ||
1980년 5월17일 밤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투쟁을 이끌어 오던 김대중이 계엄사 합동수사부 요원들에 의해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민주진영의 여러 재야인사들이 속속 검거되어 고행(苦行)의 장정(長征)길로 들어섰다.
계엄사는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의 수사결과라는 것을 발표했고 남산 지하실에서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온갖 고문·협박 끝에 만들어 낸 시나리오에 따라 군법회의라는 ‘연출’을 시작했다. 전두환 등 소위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김대중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 나도 ‘조연급’으로 스카우트되어 함께 구금되고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네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내란음모도 엄청난 범죄지만 그 죄명만으로는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으니까 김대중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로 얽어놓았던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에 항거하여 귀국을 거부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중 일본에서 한민통을 조직하고 그 의장 취임을 승낙하였다는 혐의였다. 이에 대하여 김씨는 한민통 결성 전에 일본에서 한국기관원들에게 납치되었으며 의장직 수락도 한 일이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았다.
첫 공판이 열린 것은 그 해 8월14일이었다. 육군본부 법정 안은 살기마저 감돌았다. 김대중에 대한 공소장 낭독만도 오전 8시부터 시작하여 1시간27분이 걸렸다. 오후에 속개된 공판에서 나머지 23명의 공소사실 낭독은 5시간 만에 끝났다. 하루 종일 공소장 낭독만 한 셈이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범죄 혐의를 부인했다(한두 사람이 사실과 다른 묘한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판관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역습을 하기도 했다. 9월11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관은 김대중에 대하여 사형을 구형했다. 그 다음 날에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김대중의 최후진술은 9월13일에 열린 18차 공판에서 있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감동적인 발언이 계속됐다. 한 신문은 “마치 유언을 하듯 비장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어지는 김씨의 최후 진술은 법정을 완전히 압도하였다”고 썼다.
“나는 그저께 구형을 받았을 때 의외로 차분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날은 평소보다 더 잘 잤습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이 재판부를 통해 나를 죽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를 살릴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국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주의가 살아날 것을 확신합니다. 이번에 다시 구속돼 성경을 읽고 더 한층 하느님께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합니다.”
끝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 앉아 계신 피고인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유언 같은 최후진술이 끝나자 방청석의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민주주의 만세, 김대중 만세를 외쳤고, “오, 자유여…”로 시작된 ‘민권의 노래’를 불렀다. 사흘 뒤인 9월17일 아침 10시, 군법회의 재판장 문응식 소장의 입에서는 (우리가 걱정했던 대로) “피고인 김대중, 사형”이란 말이 떨어졌다.항소심(11월3일)에서 항소가 기각되고 나서 그때까지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던 일부 피고인들(주로 계엄법 위반)이 남한산성 밑의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어 김대중을 비롯한 내란음모 피고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어 1981년 1월23일, 대법원 또한 상고기각으로 그 위법투성이인 군법회의 판결을 ‘합격’으로 판정했다. 이제 형 집행만 남았다. 우리는 감옥 안에서 가슴 조이며 숨막히는 긴장에 휩싸였다. 그러던 우리에게 ‘감형’ 소식이 날아들었다.
죽음을 면한 김대중은 그 후 계속된 파란만장·우여곡절을 잘 극복하여 마침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0년 6월 역사적인 평양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그 해 겨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여 고문과 투옥으로 김대중 일당(?)을 말살하려 한 전두환·노태우는 각기 대통령까지 지내고 나서도 구속 피고인이 되어 내란 및 군사반란죄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이던 우리는 특별재심에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를 저지·반대한 행위”로 인정되어 무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