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3년 4·19혁명 33주년을 맞아 재야인사들이 4·19묘지 앞에서 함께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병걸씨, 네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 | ||
1979년의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궁정동의 안가 술상머리에서 사살되자 바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악명 높은 유신헌법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의 반감을 샀다. 뿐인가 조속한 민주화 이행을 주장하는 각계 인사들을 계엄포고령으로 걸어 잇달아 구속하는 시대역행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서울 명동 YWCA강당에서 ‘위장 결혼식’사건이 발생하여(11월24일) 대량 검거사태로 번졌다.
“신랑 홍성엽군과 신부 윤정민양의 결혼식이 있다”는 명함형 청첩장(?)까지 돌려서 많은 하객(?)을 모아놓고 나서 함석헌 선생 주례로 결혼식을 빙자한 집회를 하려 한 것이었다. 이 거사 모의에는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씨 등과 함께 문학평론가 김병걸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김씨는 해방 후 단신 월남하여 영어교사를 하던 중 1962년 <현대문학>에 <에고에의 귀환>이란 평론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후 활발한 문학활동을 해왔다. 1963년부터 경기공업전문대 교수로 강단에서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던 중 1974년, 반유신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가 해직을 당한다. 그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하고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나서는 문단의 선배로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결혼식을 위장하여 시민들을 모아놓고 거행하려던 집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라는 긴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소위 신군부가 기도하는 ‘최규하 대통령 만들기’를 저지하기 위한 집회였다. 11월24일 오후 5시경 서울 명동 YWCA강당에는 1천 명이 넘는 인파가 출렁였고 건물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결혼식을 내세운 이상 배역이 정해져 있어서, 주례 함석헌, 사회 김정택, 신랑측 안내 최열, 신부측 안내 강구철 ― 이렇게 짜여져 있었다. 김병걸씨는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씨와 함께 진짜 행사인 국민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식이 시작되어 사회자가 “신랑입장”이라고 외치며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박종태씨가 단상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박수가 터졌는가 하는 순간 장내에서는 “유신잔당 물러가라” “통대선거 결사반대” “거국내각 수립하라”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대회장 밖에 포진하고 있던 전경들이 출입문에 쌓아 놓았던 걸상바리케이드를 무너트리고 장내로 쳐들어와서 마구잡이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의 강제연행이 한창일 때 김병걸씨는 백기완씨 등과 함께 용케 현장을 빠져나온 뒤 밤늦게 집으로 향했다. 자정 무렵 집 앞에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에게 붙잡혀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승훈, 이호철, 임채정씨도 끌려와 있었다.
다음 날 그들은 오랏줄에 굴비처럼 한 줄로 묶여 트럭에 실려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입구에서 한 사람씩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네댓 명의 건장한 군인들이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들고 서 있었다. 옷을 벗으라기에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더니 “이 개새끼, 5초 내에 벗어!”라고 고함을 쳤다. 이어서 “엎드려”하는 구령과 함께 야구방망이와 각목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야만적인 고문은 ‘레퍼토리’를 바꾸어 가며, 말로 다할 수 없이 잔인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 언론에 보안사의 고문사실이 보도되면서 세계여론의 들끓는 비난에 봉착한 전두환 등 계엄당국은 구속 20일 만에 김씨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석방했다.
이 위장결혼식 사건은 윤보선 전 대통령쪽의 작용이 빚어낸 결과로 알려졌다. 윤씨는 재야세력이 대통령보궐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벌이도록 주문을 했다. 그러는 중에 현역 대령 한 사람이 안국동 윤씨 집을 찾아와 그런 목적으로 집회를 갖는다면 협조하겠다는 말을 하고 갔는데, 이 대령의 말에 속아서 마음 놓고 집회를 추진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돌았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사람은 박종태, 양순직, 백기완, 임채정, 최민화, 이우회, 김정택, 최열, 홍성엽, 이상익, 권진관, 강구철, 김윤환씨 등이었다. 그리고 윤보선, 함석헌, 박종열, 김병걸씨 등은 불구속 기소, 문국주, 이명준, 이신범, 조성우, 이석표, 김경남씨 등 비교적 젊은 세대는 피신을 잘하여 수배자로 남아 있었다.
보안사에 붙들려 간 사람은 기소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김씨는 군법회의 1심에서 징역 2년,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
실인즉 이 사건은 내가 변호한 사건이 아니다. 당시는 나도 필화사건 유죄 확정으로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무직자였기 때문이었다. 정작 내가 김병걸씨를 변호한 것은 나의 복권 후에 1987년 4월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서 있었던 집회사건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임채정씨와 함께 또 구속됐다. 집시법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을 거부하면서 투쟁하다가 3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그는 1984년 여름 해직 교수들에게 복직의 길이 열렸을 때 안기부 직원이 찾아와 복직을 종용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출감 후 <민중문학과 민족현실>(1989년), <실패한 인생, 실패한 문학>(1994년) 등 저서를 냈으며, 내가 그의 문학평론집 <격동기의 문학>을 받아본 것은 그가 지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뜬(2000년 10월26일) 직후였다.
▲ 지난 87년 6월10일 오후 7시 성공회성당에서 6·10국민대회를 마친 뒤 정문을 지나 세종로로 향하는 행진을 이끌고 있는 유시춘씨(맨 오른쪽). 이들은 세종로에 도착하기 전 모두 경찰에 연행되었다. | ||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서울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숨졌다. 고문치사라기보다는 살인사건이라고 해야 할 이 천인공노할 만행은 “‘탁’ 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 하고 쓰러지더라”는 유치한 둘러대기에 의해 더욱 큰 분노를 샀다. 한 의사의 용감하고 양심적인 결단(발언)으로 박군의 고문사망이 밝혀지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에 의하여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경악했고 전두환정권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른바 ‘4·13호헌선언’을 발표하여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고수하며 국민적 요구를 걷어찼다. 바로 이 4·13조치는 많은 국민의 저항을 자초했고, 학계, 종교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 재야세력과 야당에서는 연달아 반대성명을 내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5월27일, 재야 각계 인사와 통일민주당이 동참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다.
국본은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상임공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상집) 및 각 분과위원장이 조직과 활동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그 산하에는 경향 각지에서 자진 참여한 수많은 민주화운동단체, 직능단체들이 있었다.
험한 일은 주로 ‘상집’들의 몫이었다. 그런 상집 중에 여류 작가인 유시춘씨가 들어 있어 주목을 받았다. 유씨는 동생인 유시민씨가 서울대 재학중에 구속된 바 있어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맡아 고역을 감당하는 등 헌신을 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집권측은 4·13선언에 뒤이어 6월10일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국본측은 이에 정면대결하여 같은 날 전국적인 집회·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경찰의 미행·감시를 피하여 장소를 바꾸어가며 상집들은 치밀한 계획을 진행시켰고, 그런 자리에 유시춘씨의 모습은 빠지지 않았다. 유씨는 6월항쟁의 점화 지점인 서울성공회 안에 들어가서 현수막, 피켓, 전단, 성명서 등 대회 진행에 필요한 것을 챙기는 한편 외부와의 신속한 연락 등을 맡기로 자청했다.
6월8일, 국본은 ‘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6월10일 오후 6시를 기하여 전국 20개 지역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이를 폭력에 의한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덮어씌우고, 갑호비상령까지 내리면서 그 저지에 혈안이 되었다. 거사의 날 6월10일 새벽, 성공회 입구에는 이미 중무장한 경찰이 철통 같은 저지선을 펴놓고 있었다.
유씨는 성공회 성당의 박종기 신부의 측근인 한 청년과 짜고 쇼를 했다. 그가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예상대로 경찰이 제지를 했다. 유씨는 시나리오대로 “왜 내 교회를 내가 못 들어가요? 큰일났네, 나 없으면 새벽 예배 못 본단 말이오. 신부님한테 크게 야단맞겠네…”라며 표정 연기를 했다. 그때 안에 들어가 있던 그 청년이 쫓아나와서 “이제 오면 어떻게 해요! 피아노 반주가 없으면 예배 못 보지 않아요?”하면서 유씨의 손목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명의 시각, 6월10일 오후 6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하기식이 끝나는 것을 신호 삼아 거리에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일제히 울리고, 교회와 사찰에서는 타종이 잇따랐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고, 부상자, 연행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날 성공회 안에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국민대회’를 거행한 국본의 간부들은 시위 초반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들은 장안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실려가서 갇힌 몸이 되었다. 그 중에는 물론 유시춘씨도 있었다. 나흘 뒤 6·10 구속자들 일부는 강동경찰서로 옮겨졌다. 박형규, 금영균, 오충일, 양순직, 김명윤, 이규택, 송석찬, 김병오, 제정구, 지선, 진관 등 6·10 구속자 일행(?)은 서울 시내 몇 개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었다. 유시춘씨는 강동서에 제정구씨와 함께 갇혀 있었다.
그때 나는 각 경찰서를 돌며 이들을 접견했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서울 거리, 전경과 ‘닭장’ 사이를 뚫고 투석전의 현장을 달리면서 마치 야전군의 장교나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에 이어 6월26일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졌다. 종전 시위와는 달리 6월항쟁 때는 넥타이부대, 의료계, 교사들, 중산층 일부까지 가세하여 말 그대로 전 국민적인 궐기를 기록했다.
이에 집권세력은 이른바 ‘6·29선언’을 내걸고 몇 가지 민주화조치를 약속했다. 구속자들도 기소되지 않고 풀려나왔다. 유시춘씨는 1973년에 소설가로 문단에 나왔고 <우산 셋이 나란히> 등 창작집을 냈으며, 이 사건으로 고생을 하고 나온 후에도 변함없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가 2001년 11월부터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