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5월10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의 배후 보도로 구속되어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이원달 중앙일보 기자. | ||
세상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졌다. 하나는 융자와 관련하여 은행측에 돈을 주었느냐, 즉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느냐 하는 뇌물거래 의혹이요, 또 하나는 거액의 부정융자는 누가 밀어주고 봐주었는가 하는 배후관계였다. 바로 이 배후인물을 알아내어 특종을 한 기자가 오늘 이 글의 주인공인 <중앙일보> 이원달 기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특종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어 거꾸로 자신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박씨 사건의 배후로 몇 사람의 이름이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앞서 검찰 발표의 ‘배후관계’라는 항목에도, ‘배후작용자’ 아닌 ‘부분적 지원자’로서 전 중앙정보부 감찰과장, 전 중앙정보부 수사관 등이 거명되었으나 세론은 그 이상의 배후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굳어져갔고, 검찰의 배후 수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불만이 팽배해갔다.
법조 출입기자들은 밤낮없이 촉각을 세우고 연일 취재전선을 펴느라고 여러 날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중앙일보> 이원달 기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한 가지 계책을 꾸며내서 실천에 옮겼다. 검찰의 소환을 받고 출두하는 은행관계자처럼 가장을 하고 검찰청 수위실을 무사 통과한 다음, 대검 특수부 수사실에 들어가는 데 극적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수사관들은 깜짝 놀라서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 기자는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박영복 사건의 배후인물 수사상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여당인 공화당의 이우현 전 의원이 국회 재경위 간사일 때 박씨로부터 돈을 받고 은행에 대출 압력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박씨 소유의 저택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청와대 사정수석실에도 보고되었으며 머지않아 이 전 의원을 구속할 방침이라는 내용도 알아냈다. 또 다른 배후인물로 청와대 경호실의 지아무개란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굉장한 특종감이었다.
3월30일치 <중앙일보>에는 ‘김보근 전 모 기관 과장, 전 국회의원 이우현씨 구속 방침’이라는 제목이 붙은 특종기사가 1면에 머리기사로 실려나왔다.
▲ 74억 부정대출 관계인들에 대한 공판이 열리는 동안 박영복(오른쪽 끝)이 골똘한 모습으로 재판부를 응시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 ||
문제의 기사가 나간 지 사흘 뒤인 5월3일, 검찰의 출석요구를 받은 이 기자는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그리고 황재택 검사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기자는 기사 내용이 사실에 근거한 취재 결과였음을 주장하고, 그 진부는 대검 특수부 김병리 부장검사나 김치열 검찰총장에게 물어보면 다 밝혀질 것이라고 역습을 했다. 그러나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기사의 구체적인 출처는 함구했다.
검찰은 배후인물로 지목된 이우현씨로 하여금 이 기자에 대한 고소장을 내게 한 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얽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명예훼손 피의 사건의 구속영장이 공안부 검사에 의해 청구된 것이나, 서울지법에서 공안사건 영장을 전담하는 수석부장판사 집까지 한밤중에 찾아가서 영장을 발부받은 것이나, 모두 이례적이었다. 4일 새벽 2시경 이 기자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 기자가 구속되자 법조 출입기자들은 물론이고, 언론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강력한 항의와 규탄의 소리가 빗발쳤다. 외국의 유명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으며,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그리고 국제신문협회(IPI) 같은 언론단체에서도 한국정부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면서 이 기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치열 검찰총장은 “이우현이 박영복으로부터 돈을 받고 한일은행장에게 융자 청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씨가 국회 재경위 간사의 직무와 관련해서 돈을 받거나 청탁을 한 것은 아니므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는 변명까지 했다.
이처럼 검찰의 논리가 궁색한 데다가 국내외의 비판이 거세어지자 검찰은 갑작스레 이 기자를 석방했다. 구속된 지 엿새 만의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에게 역정을 내면서 직접 석방을 명했다는 바로 다음날 이우현씨는 고소를 취소했고, 이 기자에 대해서는 공소권이 없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장본인인 이 기자는 훗날 “나의 필화 사건은 지난날 정부의 대 언론관을 보여준 일단의 사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애석하게도 2000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