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조치 등으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하며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사진은 1978년 제 9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보도사진연감> | ||
이씨를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총 두목’으로 설정한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 사건의 용의자로 묶여온 사람은 자그마치 32명이나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의 지령에 의하여 남한 내에서 지하조직을 만들어 박정희정권을 타도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도 그런 도표 중의 한 축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중정은 이좌영씨로부터 정치적으로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느냐며 이 교수를 다그쳤다. 이 교수가 온갖 가혹행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자 ‘이씨가 직접 하지는 않았더라도 다른 공작원이 개입하여 지령을 내린 것이 확실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 교수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1967년 가을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북한을 방문하여 3박4일 동안 체류했던 것이다. 이 교수의 말에 의하면, 내각초대소에서 김일 제1부수상과 면담하고 식사도 함께했다. 조국의 통일에 관한 피차의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이 교수로서는 자신이 그렇게 한대서 당장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그렇다고 외세나 집권자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북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 중정의 고문 속에서 울릉도 간첩단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이성희씨.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그가 당한 고문은 혹독했다고 한다. | ||
‘매 앞에 장사 없다’고 마침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예, 그렇습니다”라는 식의 문답식 조서가 꾸며졌다. 심지어 육군 장성으로 있는 동생네 집에 가서 일박할 때, 미군 철수에 관한 기밀을 탐지했다는 것과 입북했을 때 남한사람들의 생활상을 그쪽에 말한 것을 묶어서 ‘간첩행위’로 엮어내는 데도 속수무책이었다.
검찰(서울지검 공안부)에 넘어와서도 검사의 친절과 신경질을 순차 겪으면서 ‘만일 혐의를 부인하면 다시금 중정으로 불러들이겠다’는 중정측의 협박이 떠올라서, “공소장은 검사님 일하기 좋게 마음대로 꾸미십시오”라고 말해버렸다. 체념의 독백이 되어버린 그 말에 검사의 표정이 금방 환해지더라고 했다. 한때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바에야 모욕적인 교수형보다는 자결을 하기로 마음먹기도 했으나 아내와의 접견에서 마음을 바꾸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필자는 범세계적 양심수 석방 지원기구인 국제엠네스티의 의뢰에 따라 이 교수의 변호를 맡았는데, 통일에 대한 그의 일념과 선비다운 품성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1974년 봄·여름에는 유신정권의 명맥이 걸려 있던 대통령긴급조치의 돌풍이 거세었고,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등의 재판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어서 정권의 독기가 드세어져 갔다. 그런 영향도 있고 해서 그해 7월3일에 있었던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엄청나게 무거운 구형을 쏟아냈다.
1심 재판부는 주범격으로 기소된 전영관 등 3인과 이성희, 최규식 등 5명에게 사형을, 나머지 27명에게 징역 1년 내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해 12월9일 항소심 판결에서 이성희 교수는 최규식씨와 함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그밖의 5명에게 형집행유예가 내려지고 나머지 피고인들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무기수가 된 이 교수는 그 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91년 2월, 이례적인 가석방으로 수감생활 15년 10개월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看病) 일을 하며 많은 시국사범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국제엠네스티를 비롯한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석방압력에 따라 가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울릉도 사건 관련자 구원회’를 중심으로 집요한 구명운동을 전개해온 터였다.
이 교수가 옥살이하는 동안 그의 부인은 3평밖에 안되는 구멍가게에서 한 그릇 1백50원하는 국수를 팔기도 했다. 무허가라고 해서 경찰의 시달림을 받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