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10월3일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 ||
송 교수는 10월3일 검찰에 처음으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서, 14일 “북한 노동당을 탈당하고 독일국적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1주일 뒤인 22일 검찰이 송 교수를 구속함으로써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1월19일 송 교수를 기소하면서 검찰은 그의 친북행적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용을 담은 공소사실을 공개했다. 1973년 노동당에 가입한 이래 북한의 지시에 따라 유학생 포섭과 주체사상 전파 임무를 수행해왔으며, 그런 활동을 인정받아서 1991년 5월 김일성을 면담한 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서열 23위·가명 김철수)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송 교수와의 인연도 있는 데다 주변의 권고도 있고 해서 변호인단에 참여하기로 했다. 감사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떠났던 법정을 7년 만에 다시 들어가 변호인석에 앉게 되었다.
송 교수의 공판은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로 법정은 늘 만원을 이루었다. 재판에서는 송 교수가 과연 노동당 후보위원인지의 여부가 단연 쟁점이 되었다. 여러 차례의 입북은 송 교수 본인도 시인하는 터였고, 공작금 수수 부분은 학술대회 참가비로 7만~8만달러를 받았다는 정도의 입장 차이가 있었는데, 후보위원문제는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 종사’에 걸려 사형까지 과할 수도 있는 중죄였다.
▲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 교수는 지난해 8월5일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독일로 돌아갔다. | ||
이런 판결에 대하여 변호인측은 “…증거능력도 없는 황장엽씨 등의 진술을 토대로 유죄를 인정한 것은 부당하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는 “남편은 한평생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몸바쳤는데 40여 년 만에 찾은 조국에서 포승과 수갑으로 묶이다니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검찰과 변호인 양측이 모두 1심 판결에 불복을 한 만큼 항소심은 또 하나의 격전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2일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송 교수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고,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풀려났다.
항소심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1심과 견해를 달리했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후보위원 여부, 즉 ‘송 교수가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의 논쟁에서 2심은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즉 “황장엽씨의 진술에 신빙성은 있으나 임동옥과 김용순으로부터 들었다는 말만 가지고 송씨가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기에는 아무래도 미흡하고, 김경필의 대북보고문(디스켓)의 내용 또한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송씨의 저술활동에 대해서도, 1심에서 “친북 편향의 학문 활동을 하고,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고 본 것과는 달리 항소심에서는 “친북편향은 인정되나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명백한 위협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김일성 조문도 1심에서 반국가단체 지배지역으로의 탈출행위로 본 것과는 달리 장례 및 추모행사에 참석한 것은 의례적이었다고 보아 역시 무죄라고 했다. 다만 1991년부터 1994년 사이 다섯 차례 입북한 것은 1심과 마찬가지로 유죄(탈출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엄격한 유죄의 증거를 요구하는 한편 국가보안법도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이 사건이 시의부적절한 이념논쟁을 일으켜 남북대화의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내부 갈등을 초래하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보수세력과 민주·진보진영 사이에선 송 교수에 대한 처벌 문제로 대판 편싸움이 벌어진 터였는데, 앞으로 남은 상고심 최종판결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항소심의 전향적인 판결이 나온 뒤, 인터넷에는 “빨갱이 판사 물러가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아직도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