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월 29일 오전 강원도 원주시 건강보험공단 대강당에서 열린 2018 공공기관장 워크숍에서 박수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임기가 남아있었지만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공공기관 전직 임원들은 취재 요청에 하나같이 난감한 반응을 보였다. 자칫 정권에 ‘찍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보복을 당할까 걱정된다”고 털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할 말이 없다”는 그들을 설득해 현 정부의 낙하산 인사와 관련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근혜 정부 때 발탁됐다가 올해 초 그만둔 한 공공기관 감사의 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사장이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를 불렀다. 감사를 교체할 예정이라면서 사직서를 내라고 요구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채우고 나가겠다고 하자 그 사장이 ‘당신도 낙하산으로 내려오지 않았느냐. 버텨서 좋을 게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며칠 후 사장이 다시 만나자고 해서 회사 밖의 한 식당으로 갔는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내가 감사 재직 시 지인들에게 편의를 봐주거나 특혜 채용을 해준 내용들을 열거했다. 회사에서 안 나가면 수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거의 협박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와 관련된 은밀한 비리들을 사장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정권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사표를 쓰고 나왔다.”
공공기관에서 최고위직을 지냈던 전직 인사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그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는 “어느 날 사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사표를 쓰라는 얘기였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그만둘 순 없는 노릇 아니냐. 그래서 사유를 물었더니 ‘이미 다 끝난 얘기’라는 답변만 들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내가 자유한국당 쪽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던 게 문제가 됐다고 들었다. 그 자유한국당 사람들은 고향 선후배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장 권한 밖의 일이라며 안 나가면 내가 다칠 것이란 말도 들었다. 겁이 났다”면서 “나오기 전까지 사장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비서실과 의사소통을 했을 뿐이었다. 동료들도 왠지 나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조직의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또 다른 공공기관 임원의 경우 줄을 잘못 섰다가 ‘물을 먹은’ 케이스라고 했다. 그가 일했던 공공기관 내부에선 정권 출범 직후부터 친문 전직 의원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올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한다. 실제 그 전직 의원은 이 공공기관 사장으로 발탁됐다. 그런데 낙하산이 발표되기 전부터 전직 의원의 한 고등학교 후배가 조직 내 실세로 오르내렸다. 이 후배가 쇄신안, 인사 등을 그 전직 의원과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회사 임원들이 그에게 줄을 대려는 현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이 전직 임원은 “실세로 소문이 났던 직원이 새로운 사장 이름을 여러 번 언급하며 회사가 확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작성한 ‘살생부’도 공공연히 돌았다. 내 이름도 포함돼 있었는데 설마 했다. 그 직원은 나보다 아랫사람이었는데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망설여지기도 했었다”면서 “신임 사장이 온 후 나를 비롯해 몇몇 임원이 옷을 벗었다. 그 실세 직원은 핵심 보직으로 발령났다.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린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고 말했다.
한 공공기관 전직 임원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추진하는 정책의 책임자를 맡았다가 찍힌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그 역시 문재인 정부 들어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주도해서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정권이 바뀌니 적폐가 돼 있더라.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다”면서 “솔직히 청와대가 시킨 일인데 어쩌란 말이냐”라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내가 나간 자리에 친문 인사가 낙하산으로 들어왔다. 일찌감치 내정돼 있었다고 하더라. 그가 내 전력을 강하게 문제 삼았다고 들었다. 그를 임명하기 위해 나를 탈탈 털었던 것으로밖엔 생각이 들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사례들을 접한 여권 인사들은 낙하산 인사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을 이해해달라고 주문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제에서 낙하산 인사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순 없다. 대통령 국정 철학을 이해하고 있는 인사들을 발탁하는 게 통치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낙하산 인사는 종종 이뤄진다”고 했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한다. 선거가 끝난 후 그들을 챙겨줘야 한다. 그것이 낙하산 인사의 현실적 원인”이라면서 “민주당의 경우 10년 만에 정권을 잡았다. 감투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아직도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면서 “10년간 보수 정권에서 호가호위했던 적폐 인사들을 교체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이런 해명들에 대해 야권에선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사고방식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야권 시절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었다. 낙하산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어느 정도 업무 관련성을 갖고 있는 인사를 임명하라는 게 민주당 입장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 공공기관의 낙하산 인사 근절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현 정권 들어 소위 ‘캠코더 인사’로 대변되는 낙하산이 공공기관에 대거 투척됐다. 캠코더란 ‘캠프 출신, 코드 인사, 더불어민주당’을 뜻한다. 흡사 이명박 때의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과 박근혜 때의 ‘서수남(서울대, 교수, 영남)을 연상케 한다.
바른미래당이 9월 4일 펴낸 ‘공공기관 친문백서’엔 이러한 실태가 잘 나타나있다. 백서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1년 4개월 동안 340개 공공기관에서 임명된 1651명 임원 중 365명(22%)이 낙하산 인사였다. 365명 가운데 94명은 기관장이었는데, 20대 총선에서 낙마했거나 불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전직 국회의원들이 상당수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매일 한 명꼴로 낙하산 인사가 임명됐다”며 “문재인 정부도 박근혜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능력과는 무관하게 정치권 인사들을 주요 기관의 기관장이나 임원으로 내세워 신적폐를 쌓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