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을 격려하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일요신문] 지난 2일 마무리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메달 획득으로 많은 스타들이 새롭게 탄생했고 감동적인 경기에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특히 이번 대회에선 우리 국가대표팀이 아닌 타국의 경기도 주목을 받았다. 더 이례적인 건 메달 획득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낸 사실이다. 바로 ‘쌀딩크’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이야기다.
컵라면에 새겨진 베트남 선수들.
대회 개막 이전부터 베트남의 행보에 눈길이 갔다. 앞서 지난 1월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은 준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4위에 그쳤다.
선전이 예고된 베트남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예상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냈다. 예선에서 파키스탄, 네팔, 일본을 상대로 3전 전승, 무실점을 기록하며 조 1위로 당당히 16강에 진출했다.
베트남의 승승장구는 토너먼트에서도 계속됐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 아시안게임 16강 진출을 넘어서 8강, 4강까지 진출했다. 베트남에서는 박 감독을 향한 찬사가 쏟아졌다. “귀화 해달라”는 애정어린 요청이 이어질 정도였다.
4강에서는 운명적 매치가 성사됐다. 박항서 감독은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조국 대한민국을 상대했다. 비록 객관적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국에 패했지만 위로와 응원의 박수가 이어졌다.
3·4위전을 앞둔 시점, 베트남 다낭으로 향했다. 이전부터 계획된 여름 휴가였다. 공교롭게 베트남 방문 일정과 경기 일정이 겹쳤다.
하노이나 호치민 같은 대도시가 아닌 다낭이었기에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곳 또한 축구 열기가 뒤지지 않았다. 컵라면 등 공산품에는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이 새겨져 선수들의 인기를 실감케했다. 해외 축구에도 관심이 많아 일상생활에서도 각국 명문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대형 TV가 설치된 펍에서는 예외없이 축구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다낭 시내에 위치한 스포츠 센터에는 매일 저녁 공을 차는 청년들로 가득했다.
베트남 주민들은 일상속에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베트남 뉴스 진행자는 아시안게임 소식을 전하며 베트남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대회 광고에서도 멀리뛰기, 세팍타크로 등 메달리스트들과 함께 축구 선수와 박항서 감독이 화면을 채웠다.
#임시 TV 설치하고 가던길 멈춰서서 응원
역사상 최초 동메달이 걸린 3·4위전의 날이 밝았다. 이날은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집집마다 베트남 국기가 내걸렸고 길거리에서는 국기와 붉은 바탕에 가운데 노랑색 별이 그려진 티셔츠가 팔리기도 했다. 베트남 주민에게 이유를 묻자 “내일은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립기념일과 축구 경기가 겹쳐 더 즐겁다”고 했다.
경기 시간이 되자 곳곳에서 경기를 시청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TV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유럽 축구경기를 보던 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베트남과 아랍에미리트(UAE)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마치 2002년 당시 거리응원을 펼치던 대한민국을 연상케 했다.
3·4위전 응원열기. 길을 가던 오토바이도 멈춰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위협적인 장면이 이어지자 주민들 입에서는 연이어 탄성이 나왔다. 박 감독이 화면에 잡히면 환호가 나오기도 했다. 기자 또한 박수를 치고 아쉬움의 목소리를 내자 주민들이 흘끗흘끗 뒤돌아 보기도 했다. 이들도 기자가 한국인임을 알아챈 듯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길을 가던 현지인과 한국인 관광객들도 멈춰서서 TV 화면에 집중했다. 지나가던 오토바이도 멈췄다. 그릇을 파는 옆 가게 점원도 손님이 없으면 곧장 뛰쳐나와 경기 상황을 확인했다.
계속되는 베트남의 공격에도 경기는 1-1로 마무리됐다. 연장전 없이 승부차기가 이어졌다. 승부차기를 앞두고 벤치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박항서 감독의 모습이 연신 카메라에 잡혔다. 그때마다 일부 주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위쪽으로 흔드는 행동을 했다.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긴장감과 압박감을 느끼는 박 감독에게 ‘고개를 들라’는 응원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일부는 승부차기를 앞두고 초조함에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승부차기는 UAE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실망감과 응원의 목소리가 공존했다. 박항서 감독의 얼굴이 화면에 잡히는 순간 한 주민이 기자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밝은 미소와 함께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코리안(Korean)”이라고 답했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잘했다’는 의미인 ‘람 똣 람(làm tốt làm)’이라는 말을 주고 받았다.
이어진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에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리조트 로비 라운지에서도 대형 TV를 통해 경기가 중계됐다.
한국의 금메달로 결승전은 마무리됐다. 한국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기자에게 간간이 축하의 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경기 다음날 베트남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3·4위전을 지켜보던 펍에서는 해외축구 경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전날보다 한산한 모습이었다.
전날 사람들이 몰려있던 전통 시장의 구멍가게 앞과 리조트 라운지에는 TV조차 사라졌다. 리조트 직원에게 이유를 묻자 “어제는 아주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TV를 설치했었다”고 설명했다.
#스즈키컵 바라보는 베트남
베트남 축구는 4위로 대회를 마무리했지만 ‘박항서 열풍’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했다. 실제로 박 감독과 선수들은 베트남 귀국길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경기중 박 감독이 살며시 미소를 지은 장면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 등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았다.
아시안게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 베트남 축구의 눈은 이제 ‘스즈키컵’으로 불리는 동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로 항하고 있다. 베트남은 이번 대회에서 10년 만의 우승을 노리고 있다. 박 감독 또한 대회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오는 10월 한국에서 전지훈련과 평가전 일정도 잡았다. 베트남 축구의 행보에 많은 이들의 눈길이 쏠리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베트남 다낭=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