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네티즌들은 “124년 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의 유족을 이제와서 등록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조선 건국에 기여한 신진사대부 유족도 찾아서 보상하고 임진왜란 유족도 보상하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홈페이지 캡처.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농민층이 일으킨 민란이다. 과거에는 동학란이라 불리다가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렸고, 최근에는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동학혁명 유족 등록이 이번에 처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설치돼 총 3644명의 참여자와 유족 1만 567명을 등록하고 2009년 활동이 종료됐다.
그러나 동학혁명 참여자가 20만~30만 명으로 추정되는 데 반해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인원은 1만여 명밖에 되지 않아 미등록 유족을 추가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 등 동학혁명 전적지가 많은 호남 지역구 의원들이 주도해 지난 2016년 유족 신청 기간 제한을 없애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지난 2017년 12월 통과됐다.
최초 유족 범위는 참여자의 자녀 및 손자녀까지로 규정됐으나 이후 증손자녀, 고손자녀까지 확대됐다. 독립유공자 혜택은 손자녀까지만 받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측은 최근 논란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유족을 등록받아 보상금을 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유족 등록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일 뿐”이라고 말했다.
보상금은 없어도 국가 유공자처럼 각종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현재 유족으로 등록하면 등록됐다는 안내장이 한 장 발부되는 것 외에는 어떤 혜택도 없다”고 말했다. 반란군의 후예로 낙인찍혀 숨죽이고 살았던 후손들에게 안내장을 발부함으로써 혁명군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조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굳이 유족 등록 신청을 받는 것은 향후 혜택을 주기 위한 사전작업이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 2013년 동학혁명 후손에게 독립유공자 후손에 준하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특히 동학혁명은 호남 일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유족도 호남 일대에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 정치인들이 동학혁명 유족 등록을 주도한 것은 결국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의 일환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호남에 거주하고 있는 유족이 많으냐는 질문에 심의위 관계자는 “그런 자료(지역별 유족 등록자 수)는 따로 가지고 있지 않아 모르겠다”면서도 “호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족이 있다”고 답했다.
동학혁명 유족 신청 기간 제한을 없애는 개정안을 발의했던 유성엽 의원 지역구인 전북 정읍에는 이미 국고 지원을 받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기념관이 있고, 2020년까지 정부 지원으로 예산 400억 원을 투입해 기념공원도 만들 예정이다.
124년 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의 유족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동학혁명은 일반 농민들이 참여해 일으킨 사건이다. 전봉준 등 지도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만 일반 참여자의 경우 정식 군인처럼 참여 기록이 따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심의위 관계자는 “당시 문헌이나 참여자 유족, 지역 주민들의 증언 등을 참고해 심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참여자 본인도 아니고 참여자 유족이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이 심사에 반영된다면 주먹구구식으로 심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사위원회는 5인의 민간위원과 관계부처 공무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엇갈린다. 진보진영에서는 동학혁명에 대해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며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으로 이후 한국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보수사학계에서는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빌미가 돼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면서 “124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념해야 할 역사적 의의는 없다”고 평가절하한다. 심지어 민중사관을 높이 평가하는 북한에서도 동학혁명에 대한 평가는 우리나라보다 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에서는 홍경래의 난과 이괄의 난을 더 높이 평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동학혁명을 혁명으로 격상시킨 것은 진보진영과 대립관계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지난 1963년 동학혁명 기념탑을 만들고 제막식에서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에게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이라며 “5·16혁명도 이념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인이 주도한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하기 위해 동학혁명을 이용한 것이다.
보수성향 역사학자인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동학농민운동 참여자들 중 일부는 이후 일진회로 변신해 사실상 친일행위를 했다”고 비판했다. 일진회의 최초 목적은 일본과 연대해 대한제국을 문명개화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나, 이들은 을사늑약을 환영하거나 한일합방을 지지하는 등 친일단체로 변질됐다. 동학혁명 유족을 등록하더라도 일진회 등에 참여했던 인물의 유족은 걸러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주천 원광대 전 사학과 교수도 “조선시대 수많은 민란이 있었는데 동학농민운동만 특별대우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 전 교수는 “일반 민중들이 대규모로 참여해 일으킨 민란이라는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은 흥선대원군과 연계해 구질서를 복원하려 했던 인물이다. 이를 반봉건 투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절하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
조병갑 증손녀 조기숙 ‘108배’한 까닭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설치된 가운데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조병갑의 증손녀가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됐다. 동학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해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데 조기숙 전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이 조병갑의 직계 증손녀로 밝혀졌다. 결국 조 전 수석은 지난 2006년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참석해 유족에게 공식사과했다. 행사에 참석한 조 전 수석은 “조상을 대신해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서 “당사자인 조상이 유족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하나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언론에 (조병갑의 증손녀란 사실이) 보도되기 전에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진작에 찾아뵙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조 전 수석은 또 “조상의 잘못을 사죄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며 “여러분의 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