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한 면세점. 사진 박정훈 기자.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지난 7월 국내 면세점 매출은 13억 4300만 달러로 지난해 동월 대비(9억 8300만 달러) 36.7%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면세점 매출이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은 중국 다이궁들의 ‘싹쓸이 쇼핑’ 덕분인 것으로 분석된다.
면세점 관계자는 “일반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는 자기가 필요한 물품만 몇 개 사는데 중국인 관광객들의 경우는 대부분 구매 제한 수량을 꽉 채워 물건을 사간다”고 설명했다.
면세점들은 매출이 늘어나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국내에선 심각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한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다이궁들이 면세점에서 구입한 화장품들을 국내 시장에 풀면서 도소매상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과거에는 다이궁들이 말 그대로 보따리상 수준이었는데 최근에는 기업화됐다. 이들이 유통하는 면세품 규모가 엄청나다. 다이궁들이 빼돌린 면세품들을 새벽이면 트럭으로 실어 나른다고 들었다”면서 “면세 물품이 시장에 풀리면 일반 매장은 가격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어차피 물건 팔리는 건 똑같으니 나 몰라라 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최근 면세점 간 경쟁까지 치열해져 다이궁들은 면세 혜택에 각 면세점 할인 혜택까지 추가로 받아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일반 도소매점이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이궁이 빼돌린 면세품들은 어디에서 팔리고 있는 것일까. 일부 지역에서는 면세품 전문 판매점이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 서류세탁을 거쳐 정상 제품으로 팔리기 때문에 단속도 쉽지 않다. 최근에는 빼돌린 면세품을 정상 제품으로 둔갑시켜주는 브로커도 생겼다고 한다.
아예 면세점 직원이 국내 화장품 판매업자와 공모해 중국인 명의로 샴푸 17억 원 상당을 시내면세점에서 구매한 후 국내에 불법 유출한 사례까지 있었다. 업계에서는 이른바 ‘되팔이’로 국내에 풀리는 면세품 규모가 1년에 최소 수천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이미 다이궁과 관련한 문제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으나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현재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시내면세점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의 사재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상당 부분은 세금 탈루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으로 추정돼 관세청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었다.
한국 단체관광 금지조치 해제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지만 국내 관광업계는 여전히 울상을 짓고 있다. 이 역시 다이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근 중국계 국내 여행사들은 면세품을 대신 구입해주는 조건으로 마이너스 투어 상품을 대거 내놓기 시작해 국내 여행사들이 가격 경쟁력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면세품 대행 구매자를 모집하는 중국 사이트 안내 글.
관광업계 관계자는 “중국 현지 인터넷 사이트를 살펴보면 면세품 구매 대행을 할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 글을 너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광풍이 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한국여행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크게 나빠졌다. 관광업계 관계자는 “한국 여행은 다이궁이나 가는 싸구려 여행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반 중국 관광객 숫자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관광객 방문자 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마이너스 투어를 온 관광객들은 거의 소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국내 경제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또 관광업계 관계자는 “다이궁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면세점 물품들을 싹쓸이해가기 때문에 정작 일반 외국인 관광객들은 오전에 면세점을 방문해도 원하는 물품을 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외면하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다이궁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인천국제공항이다. 평일 오후 인천공항을 직접 찾아가봤다. 공항 어디를 가도 중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인천공항 측은 최근 다이궁이 크게 증가하면서 다이궁 전용 포장공간까지 만들었다. 다이궁들이 면세물품을 더 많이 비행기에 싣기 위해 포장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려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다이궁 전용 포장공간은 면세점 내부에 있기 때문에 비행기 표가 없는 기자는 갈 수 없었다. 다만 청소직원 등에게 물어보니 전용 포장공간이 생긴 이후에도 다이궁 쓰레기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부와 면세점 업계는 포장지를 기존 3겹에서 1겹으로 줄이는 안과 무단투기를 하는 다이궁들의 탑승을 제한하는 안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각한 다이궁 실태를 엿볼 수 있는 통계는 또 있다. MBN 보도에 따르면 다이궁이 주로 이용하는 베이징 노선의 항공편 지연율은 다른 노선의 2~3배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이궁이 구입한 면세품이 기내 반입 허용량을 넘는 경우가 많아 화물용으로 다시 옮겨 싣다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관세청은 다이궁과 관련한 대책에 대해 “9월 17일부터 항공권 예약을 자주 취소하거나, 장기간 출국하지 않으면서 시내면세점에서 빈번하게 고액 구매를 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면세품 현장인도를 제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편의와 국산품 판매촉진을 위해 외국인이 구매하는 국산면세품은 시내면세점 매장에서 현장인도를 허용해 왔는데 이를 일부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면세점 업계에서는 관세청 대책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면세품을 유출해 불법으로 판매하는 업자와 매장에 대한 단속은 없고 대량 구매자만 제재하는 것은 반쪽짜리 대책이란 주장이다. 면세점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로 매출에 타격을 입을까 우려하고 있다.
앞서의 화장품 업계 관계자도 “관세청의 발표를 봤는데 큰 기대 안한다. 전문 다이궁들의 활동은 막을 수 있겠지만 제재를 피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 유학생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면서 “주문서를 조작해서 면세품을 따로 빼내는 방식은 어떻게 막을 것이냐. 실효성 있는 대책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