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8월 29일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회동을 하기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청와대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문재인 대선 캠프 출신의 한 청와대 관계자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엇박자를 내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청와대가 부처로 일을 내려 보냈는데 엉뚱한 회신이 올 때가 많아졌다. 아예 안 온 적도 있다”면서 “공직사회를 어떻게 컨트롤하느냐가 남은 임기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부처 산하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한 친문 인사도 고민을 털어놨다. 그 역시 낙하산 인사로 발탁된 케이스다. 그는 “조직 내에서 소위 ‘패싱’을 당하고 있다. 교묘하게 업무적으로 나를 따돌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서 “기존에 있던 공무원들은 나를 경력 관리하러 온 외부인으로만 생각하더라. 지난해엔 눈치를 좀 보는 것 같더니 지금은 공공연히 무시를 한다.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여권에선 공직사회 기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문 대통령이 관료에 포위됐다’ ‘관료들이 대통령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등과 같은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관가 내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참여정부 때 여러 정책 실패의 주요 원인을 ‘관료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는 친문 인사들은 과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보다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하는 모습이다.
공무원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한 차관급 관료의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직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적폐청산 대상으로만 여기니 일할 맛이 나겠느냐.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결정된 일들을 다시 원점에서 해야 하거나 폐기하는 경우가 많아 허탈한 적도 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누가 열심히 일할지 모르겠다. 여기에 낙하산으로 발탁된 인사들의 점령군식 마인드도 문제가 있다.”
청와대 참모 중심의 업무 처리에 대한 불만도 들린다. 청와대 눈치만 보다보니 일의 진행 속도가 늦고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앙부처의 한 고위 간부는 “장관 결재까지 난 사안이 청와대 비서관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일에는 다 과정이란 게 있는데 청와대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재촉을 하곤 한다. 이러면 우리로선 일을 적당히 할 수밖에 없고, 원하는 대로 짜맞추기식 보고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공직사회 간에 흐르는 이러한 긴장관계를 두고 정치권에선 늘공과 어공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김앤장’ 또는 ‘장앤김’으로 불리는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정책실장 사례가 대표적이다. 장하성 실장은 어공, 김 실장은 행정고시 출신의 늘공이다. 둘은 최저임금 등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겉으로는 정책 등을 놓고 벌인 공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형적인 늘공과 어공의 주도권 싸움이란 게 중론이다.
김앤장을 바라보는 여권 인사들의 머릿속엔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을 듯하다. 참여정부 2년차에 불거졌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386출신 실세들의 이전투구다. 이 전 부총리는 김 부총리처럼 늘공이었고, 386출신들은 어공이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탄핵안 통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지금 문 대통령은 지지율이 한풀 꺾인 상태다. 집권 첫 해 눈치를 보던 관료들이 권력 누수를 틈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판박이’다.
이 전 부총리는 여권 소장파 의원들이 아파트 원가 공개를 추진하자 “386세대가 경제하는 법을 잘 모른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386 실세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이 전 부총리가 야인 시절 한 은행으로부터 받은 자문료 내역을 흘리며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 했다. 이 전 부총리는 “386 세대들이 정치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그런 식으로 뒷다리를 잡아가지고 시장경제가 되겠냐”고 응수했다. 이 전 부총리는 취임 일 년여 만에 중도하차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386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보수정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MB 정권 시절이던 2009년 한 청와대 비서관이 다른 파트 수석 비서관실을 찾아가 고성을 지르고 난동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이 비서관은 MB 정권 성골인 영포라인 출신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최측근으로 꼽혔다.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온 그는 비서관이었지만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가 폭언을 퍼부었던 상대 비서관은 늘공이었다.
박근혜 정권 청와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비서관이 직속상관인 수석을 향해 언론 대응에 문제가 있다며 충고를 했고, 이 과정에서 욕설을 한 게 알려졌다. 명백한 하극상이었지만 그 비서관은 오히려 “문제될 게 뭐냐”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비서관은 어공이었고, 수모를 당한 수석은 늘공이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어공인 참모 3인방(이재만 정호성 안봉근)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이처럼 어공과 늘공이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어느 정권에서나 있었던 현상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그만큼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정권에서 장관을 했던 한 정치인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관료들은 외부에서 온 장관을 자신들의 프로세스에 맞게 길들이려 한다. 장관과 관료 사이에 기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을 이기려 하면 상당히 힘들다. 어차피 장관은 나갈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척만 하지 제대로 안 한다. 우리가 원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선 차이점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목표 지향적인 어공은 결과를 원하고 늘공은 과정을 중시한다. 둘 다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어공 특유의 독단주의와 늘공의 보신주의가 부딪힐 경우 피해를 보는 것은 정권이다. 앞서의 장관 출신 정치인은 “어공과 늘공은 정책운용 스타일이나 동기부여 방식이 확연하게 다르다. 어공은 늘공이 타성에 젖어 일을 게을리 한다고 본다. 반면 늘공은 어공이 뜬구름만 잡고 있다며 현장을 모른다고 무시한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대통령 리더십이 해결책이다. 어공과 늘공 각각의 전문성과 장점을 살려 국정을 운영해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 들어 비서관 대부분이 어공으로 채워졌다(청와대 비서관 42명 중 33명). 이는 역대 정권과 비교해도 많은 수치다. 그러다보니 어공의 논리가 공직사회에도 강요되고 있다. 따라서 늘공으로선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 부작용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학계나 시민단체 경력만으론 국가 정책을 집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문 대통령이 명심해야 한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