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기자 = 7일 오후 88올림픽 30주년을 맞아 88 서울올림픽때 마스코트였던 호돌이를 디자인한 김현 디자이너를 만나 호돌이를 디자인하게 된 배경과 과정, 최근의 근황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호돌이 디자인 당시 대우그룹에 다니던 김현 디자이너는 그후 디자인 회사를 설립 30년간 운영하다 작년에 은퇴하였다. 2018.09.07.
―서울올림픽 30주년이다.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당사자로서 소회가 남다르겠다.
“서울올림픽 개막을 5년 앞둔 1983년 호돌이가 탄생했다. 올해가 호돌이 탄생 35주년인 셈이다. 호돌이는 올림픽 개막 전부터 열심히 휘장사업에 활용됐다. 호돌이는 조직위 차원에서 개막 전부터 운영비용을 마련하는데 자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가 올해 칠십이다. 호돌이를 서른 다섯에 만들었으니, 정확히 딱 내 삶의 절반을 함께했다. 인생의 변곡점과 다름없다.”
―어떻게 마스코트 제작 의뢰를 맡게 됐나. 당시는 대우그룹 디자인실 실무 책임자로 일하고 있지 않았나.
“조직위의 디자인분과위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직위에서 나를 포함해 후보자 7명을 지명해 경쟁을 붙였다. 후보자는 디자이너인 나를 포함해 대학교수, 광고대행사, 만화가 등 쟁쟁한 분들이었다. 조건은 똑같았다. 3개월 안에 호랑이를 주제로 한 도안 두 점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올림픽은 단군 이래 최대 행사였고, 국민 관심도 굉장했기에 정말 최선을 다하자는 맘이었다.”
―탄생과정이 쉽지 않았다.
“내자 디자인실 차석이었고, 실무 책임자였다. 낮에는 회사 일을 해야 했기에 밤마다 집에서 끙끙 앓았다. 물론 자료 수집을 할 때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다. 온갖 호랑이 사진, 그림, 동화 도안까지 다 긁어 모았다. 이민 간 친척들에게까지 호랑이 자료를 부탁했다. 동물원가서 하루 종일 호랑이를 보기도 했다. 특히 ‘호랑이와 까치’ 민화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마스코트는 무서우면 안 된다. 귀엽고 해악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민화를 통해 조상 덕을 많이 본 셈이다.”
―동물 전문가들에게까지 조언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다. 호랑이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다. 아기 호랑이를 귀엽게 그리면 자칫 고양기가 된다. 동물학적으로 같은 고양잇과지만 고양이는 호랑이보다 손발이 뭉툭하고, 꼬리가 두텁다. 이목구비도 더 큼직하다. 특히 채택 이후 이런 조언들을 많이 받았다.”
―결국 쓰러졌다고 들었다.
“3개월 동안 정말 무리했다. 자료수집만 500점, 스케치만 300점을 했다. 쉽게 안 나오더라. 마감 일주일 전에서야 비슷하게 나왔다. 바짝 밤새고 최종안을 제출하고 나오는 길에 하늘이 노래지더니 쓰러졌다. 탈진이었다. 결국 병원서 며칠 간 수액을 맞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신기한건 내가 그때 인왕산 꼭대기에 살았다.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 자리 말이다(웃음).”
김현 고문의 작품은 조직위 심사 14표 중 12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됐다. 갤럽이 당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그의 도안은 80%를 상회했다. 또 엽서를 통해 많은 국민들의 작명 공모를 받았고, ‘호돌이’란 이름이 탄생했다.
이종현 기자=호돌이의 ‘상모’가 인상적이다. 상모 끈은 여러 ‘알파벳’을 구현할 수 있었다. 김현 고문이 호돌이의 상모로 구현된 여러 도안들을 설명하고 있다.
―뭐가 제일 어려웠나.
“남녀노소 인종 상관없이 세계인 모두의 눈에 들어야 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어떻게 친근감을 주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한국적 이미지를 각인시키느냐. 천으로 만든 인형이던 금속이나 도자로 만든 기념품이던 재질에 따라, 또 크던 작던 알맞은 느낌을 줘야했다. 도안이 복잡하면, 크기를 줄일 경우 뭉그러진다. 기술적으로 디테일하게 이것저것 고려할 것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상모’가 참 인상적이었다.
“호랑이 자체는 국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한국적 이미지를 플러스할까 고민했다. 한복도 입혀보고, 포졸복도 입혀봤다. 그럼 포인트인 호랑이 무늬가 가려지더라. 그래서 부채도 들려 봤다. 그러다 갑자기 상모가 생각났다. ‘아! 이거다!’ 싶더라. 그 상모 덕을 엄청 봤다. 상모 끈은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않나. 그것으로 여러 문자(알파벳)를 구현할 수 있었다. 특히 민속의상을 입힌 호돌이 기념품이 정말 많이 팔렸다.”
―호돌이가 채택되고 바로 ‘디자인파크’를 창업했다.
“당시 다니던 대우는 디자이너들에게 최고의 직장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정말 대우(大宇)가 대우(待遇)가 좋았다. 회사는 빨리 발전했고, 일도 어마어마했다. 저는 직급이 계속 올라 갔고, 관리자로서 일이 많아졌다. 관리자보단 크리에이터로서 일하고 싶었다. 결국 독립했다. 독립하고 타 회사들과 경쟁과 경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호돌이 팀’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인정해주더라. 정말 도움 많이 됐다.”
호돌이에서 시작된 김현 고문의 ‘디자인파크(현 디파크브랜딩)’는 한국의 CI 및 BI 분야에서 큰 획을 긋는다. 호돌이 이후 김 고문은 대전엑스포의 ‘꿈돌이’, 한국관광공사의 ‘초롱이’, ‘대한민국 정부’ 등 공공 도안은 물론 청정원, BC카드, 삼성 래미안, LG트윈스 등 누구나 알법한 기업 도안들까지 이 세상에 내놓는다. 혹자는 국내의 CI, BI 등 산업 디자인 분야를 김현 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호돌이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다. 기념품들이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특히 ‘응답하라1988’ 방영 당시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작 난 별로 없다(웃음). 대단히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아껴주시고. 요즘엔 클래식 소품으로 많이 모으시더라. 개중엔 정말 대단한 콜렉터들도 있고. 좀 안타까운 것은 ‘호돌이’는 대회 마스코트였기에 행사가 끝나면 수명이 끝이라는 거였다. 현재 판권은 IOC에 있다. 다행히 최근 어떤 분이 IOC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다시금 상품화하고자 시도한다고 들었다. 잘됐으면 한다.”
TvN의 인기드라마 ‘응답하라1988’ 다시금 ‘호돌이’를 소환했다. 사진=TvN ‘응답하라1988’ 캡쳐
―지난해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들었다.
“그렇다. 50년 일했다. 쉬고 싶었다. 나이에 따라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이젠 젊은이들과 경쟁하고 뛸 때가 아니다. 그저 후배들 도와주고 자문해주고, 또 심사나 강의도 한다. 요즘엔 밀렸던 여행도 다닌다. 지난해 11월 와이프와 히말라야 트래킹을 다녀왔다. 낼 모래는 스페인을 간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멀고 어려운 곳부터 다녀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김현에게 ‘호돌이’는 어떤 의미인가.
“싫던 좋던 내 분신이다. 대표작들도 많지만 이만한 효자가 없다. 최고의 효자다. 실제 호돌이가 탄생했을 때 첫 딸을 얻었다. 호돌이와 첫째가 동갑이다. 나와 호돌이는 부자지간이나 마찬가지다. 아들 덕 참 많이 봤다. 누군가 나를 소개할 때, 언제나 난 ‘호돌이 아빠’다. 해외 특강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말 나와 호돌이는 같이 가는 거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몸값 껑충 뛴 88서울올림픽 기념품들...기념책까지 발간한 수집광도 풍물시장에서 구입한 호돌이 뱃지. 여전히 많은 수집광들이 서울올림픽 기념품들을 찾고 있다. 구단비 인턴기자 ‘일요신문’은 9월 12일, 서울 신설동의 풍물시장을 찾았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풍물시장은 수집광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주로 배지를 다루는 한 빈티지 상점에 들어가니, 주인 이용수 씨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이곳은 ‘호돌이’ 등 서울올림픽 기념품을 모으는 수집광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호돌이 기념품을 보여 달라’는 기자의 말에 이 씨는 “우리 가게에 호돌이 배지가 17종이나 있다”라며 “요즘에도 호돌이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씨는 “우리 가게엔 호돌이를 찾는 단골들이 꽤 있다”라며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사람들은 물론 20~30대 등 젊은 연령층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서울올림픽 기념품은 올림픽을 경험한 세대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1988년에 태어난 빅뱅의 지드래곤과 태양이 뮤직비디오에서 호돌이 모자를 쓰고 등장하면서 젊은 연령층 사이에서도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렇듯 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린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수집광들 사이에서 호돌이 등 관련 기념품들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하다. 이는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중고시장에서 호돌이 인형은 15만 원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가장 인기가 높은 제품은 호돌이가 새겨진 OB 유리컵이다. 그 유리컵은 개당 3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심지어 기념 성화봉은 90만 원의 고가를 형성하고 있다. 올림픽이 좋아서 책까지 출판한 사람도 있다.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인 최지웅 씨는 소문난 서울올림픽 수집광이다. 최 씨는 1000점이 넘는 서울올림픽 기념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기념품들을 포함해 서울올림픽 당시 사진과 SNS를 통해 모은 사람들 관련 추억을 담아 ‘88서울’이란 아카이빙 책을 출간했다. 최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가 오래전부터 모은 기념품을 혼자 보기보단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시작했다”라며 “국가적 차원으로도 (기념품들을) 정리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구단비 인턴기자 danbi@ilyo.co.kr |
서울올림픽 30주년특집(3)-탁구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 유남규 인터뷰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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