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병원 앞 황색점멸등 교차로 전경. 최준필 기자
9월 13일 오후 1시 30분 서울시 동작구에 있는 중앙대학교 부속 병원 앞 삼거리. 이곳의 횡단보도는 총 7개로 횡단보도마다 설치된 신호등들은 전부 꺼져있는 상태다. 수많은 사람과 차량이 함께 뒤엉킨 삼거리를 보면서 “과연 대한민국이 맞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후진적 교통 체계를 갖춘 중국의 어느 거리에 와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곳은 황색 점멸등 체계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대 병원 앞 삼거리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황색 점멸 교차로가 있는 곳이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중대 학생들이 병원 옆쪽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수차례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황색 점멸등 교차로이기 때문에 수시로 주변을 살펴야 한다. 갑자기 커다란 버스가 속도를 내면서 ‘쌩’하고 학생들 앞을 지나갔다. 뒤늦게 횡단보도에 도착한 아주머니는 오토바이 때문에 흠칫 놀랬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대한 덤프트럭도 횡단 보도 앞을 지나쳤다. 모든 차량이 지나간 후에야 겨우 학생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다.
중대 병원 앞 황색점멸등 교차로 전경. 최준필 기자
중앙대학교의 한 학생은 “여기는 횡단보도 개념이 없어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많이 한다”며 “인도도 좁아서 사람 3명 이상 못 다닌다. 그래서 학생들이 차도 쪽으로 많이 걷는다. 위험천만한 경우를 자주 봤다”고 설명했다. 다른 학생은 “차량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건너기가 힘들다”며 “신호등이 있으면 보행자가 더욱 편하게 횡단보도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중대 병원 앞 삼거리에 신호등 체계가 처음부터 없었던 곳은 아니다. 2010년 12월, 이곳에 신호등이 설치됐지만 교통 체증이 심화되면서 2011년 3월 황색 점멸등 체계로 바뀌었다. 동작구청 관계자는 “중대 병원이 개원하면서 신호등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차량이 더욱 막혀서 지역 주민들의 민원 때문에 지금의 점멸 운영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중대 병원 앞 황색점멸등 교차로 전경. 최준필 기자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국가교통안전연구센터 센터장은 “중대 병원 앞은 신호등 체계로 운영하면 차량의 대기시간도 길어지고 보행자도 못 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며 “다만 점멸 신호를 운영할 때는 차량 속도를 30㎞이하로 떨어트리는 물리적 시설이 필요하다. 과속방지턱을 설치하거나 도로 휘게 해서 속도 낮추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점멸 신호에서는 차량 속도에 대한 제어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대 병원 앞 삼거리에선 과속방지턱은 물론 점멸신호 체계에 대한 안내 문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중앙대학교 셔틀 버스는 가속 페달을 밟아댔고 인근 공사장의 거대한 덤프트럭과 레미콘 트럭은 급격하게 속도를 올리다가 ‘끽’하면서 굉음을 냈다.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과 사람들이 한데 맞물린 풍경을 약 1시간 동안 관찰한 결과, 점멸등 신호가 위험한 이유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중대 병원 앞 황색점멸등 교차로 전경. 최준필 기자
심지어 점멸등 체계로 바뀐 이후 사고도 발생했다. 2013년 3월 14일 중대 병원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개인택시와 보행 중인 할머니의 충돌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신호등 체계가 분명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 지역은 교통 여건이 열악하다”며 “주변 민원이 많아서 해제를 했었는데 최근에 동작경찰서에 신호 운영을 다시 하라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중대 병원 앞 삼거리뿐만이 아니다. 1월 30일 오후 11시 55분경 양주시 율정동의 한 초등학교 앞 황색 점멸 교차로에서 직진하던 시내버스가 왼편에서 직진해오던 SM7 승용차와 충돌했다. 승용차 운전자는 숨졌고 버스 운전자와 승객이 경상을 입었다. 2017년 9월 새벽 2시 30분경 강릉의 무면허 여고생이 운전하던 차량에 치여 배달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20대 가장이 사망했다. 황색 점멸 교차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대 병원 앞 황색점멸등. 최준필 기자
통계도 점멸 신호의 위험성을 뒷받침한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점멸등은 현재 전국에 2만 2750개가 설치됐다. 전체 점멸신호 교통사고는 2015년부터 3년간 모두 2만여 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548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청 관계자는 “최근 3년 간 사고 한 건이라도 난 경우에 전멸 신호를 전부 해제했다”며 “점멸 신호가 위험하기 때문에 보행자 중심으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점멸 신호가 신호등 체계로 바뀌더라도 한계는 여전하다. 운전자들의 의식 부재 때문이다. 앞서의 한상진 국가교통안전연구센터 센터장은 “유럽은 교차로에 있는 노면 표지에 ‘양보’나 ‘멈춤’ 문구가 있으면 운전자들이 잘 따른다”며 “하지만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아 점멸 신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운전자들이 점멸 신호에서 반드시 속도를 낮출 수 있도록 제어 시스템을 도입하고 보행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의식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