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 그들은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들의 휴대폰 번호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과 인연을 끊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최근 러시아에서의 선수 생활 은퇴를 발표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안현수와 관련해서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일요신문’에서는 아버지 안기원 씨를 만나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속사정을 들어봤다.
막 인터뷰를 하려고 하는데 안기원 씨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 씨는 전화를 받자마자 “오, 큰아들!”하며 반갑게 대화를 나눈다. 안 씨한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큰아들 안현수와 현민, 현준 군이다. 기자의 호기심을 눈치 챘는지 안 씨는 “군대에 가 있는 현민이에요. 현수 대신 현민이가 큰아들 노릇하고 있어요. 부대의 허락을 받고 안부 전화를 한 것이고요”라고 설명했다.
막내 현준(19·신송고)은 안현수의 뒤를 이어 쇼트트랙 선수로 활약 중이다. 지난해 동계체전에서 남고부 3000m 금메달을 획득하고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힐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안현수 부친 안기원 씨.
궁금한 질문을 꺼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아들과 왜 부자지간의 연을 끊었다고 말하는 걸까. 아버지는 목이 타는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제가 현수 결혼을 반대했어요. 반대한 이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아들 입장도 있을 테니까요. 그 여자(안현수 아내 우나리 씨)가 저랑 현수 엄마를 찾아왔을 때도 우리 생각을 분명히 전달했어요.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 있던 현수는 비밀리에 여자를 만났고 러시아에도 오게 해서 같이 지내기도 했었죠. 어느 날 현수가 제게 혼인 신고를 했다고 통보하더라고요. 법적 부부가 됐으니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요. 부모가 반대한다고 비밀리에 혼인 신고를 했고 양가 상견례도 없이 러시아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저로선 참담한 심정이었어요.”
그래도 결혼은 아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아무리 부모가 반대한다고 해도 아들이 선택한 여성이고 가정을 꾸려 아이까지 낳았다면 부모는 아들이 정한 길을 인정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죠. 화가 날지언정 어떻게 자식과의 연을 끊을 수 있겠어요. 겉으로는 인연 끊겠다고 큰소리쳐 놓고선 제가 못 끊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 소치올림픽이 열릴 때 러시아를 찾았어요. 당시 한 방송사에서 현수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소치에서 현수 응원하는 제 모습을 촬영할 계획이었어요. 저랑 막내 현준이가 함께 소치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현수를 경기장 외에는 따로 만날 수 없었어요. 1000m 결승에서 금메달 획득 후에 현수가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선수촌 생활로 인해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고요. 그때 마음을 굳혔습니다. 더 이상 현수를 볼 일은 없다고. 1000m만 보고 현준이랑 바로 귀국했어요.”
안 씨한테는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가정사’가 있다. 안현수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생모가 거액의 빚을 지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남편 몰래 쓴 사채만 수억 원이었고 아내 명의로 해둔 아파트마저 빚쟁이들 손에 고스란히 넘어갔다. 같이 운동했던 선수 부모한테까지 돈을 빌린 터라 안 씨는 작은 규모의 무역업을 하면서 전처의 빚잔치를 도맡았고 운동하는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사업마저 부도 위기에 직면하는 등 불행을 거듭하던 와중에 거래처 직원으로 알고 지낸 지금의 아내가 안 씨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나이가 열세 살 차이나 났어요. 결혼은 언감생심이었죠. 가족들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가 제게 시집을 왔어요. 둘 사이에 현민, 현준이가 생겼죠. 아내는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현수에게 더 헌신적이었어요. 갓난아기와 세 살 된 아이를 데리고 빙상장을 쫓아다니며 현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현수가 러시아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 지금의 아내였어요.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감정으로 현수를 성장시켰습니다. 그 부분은 현수도 인정할 거예요.”
기자는 오래전 한 쇼트트랙 관계자로부터 안현수가 아버지와 멀어지게 된 건 돈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안현수가 성남시청에 입단하면서 받은 계약금과 그동안의 상금들을 아버지가 사업 자금 등으로 유용하면서 돈을 모으지 못했고 이로 인해 가정을 꾸린 안현수와 아버지가 다툼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안 씨도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수 생모가 큰 빚을 지고 도망친 후 그 빚을 떠안게 되면서 엄청난 생활고에 직면했었습니다. 한두 푼의 돈이 아니었으니까요. 아파트를 팔고 월세로 생활하다 현수가 성남시청 입단할 때 받은 계약금 2억 원에다 대출받아서 전세로 돌렸어요. 이 부분은 이미 현수한테 다 설명했고 이해도 구했던 부분입니다. 현수도 그렇게 하라고 했었고요. 사업이 어려워질 때는 현수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제가 여유가 있었다면 현수 돈을 왜 썼겠어요. 현수 이름으로 통장도, 집도 장만해놨을 겁니다. 여유만 있었다면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현수는 러시아로 떠난 이후 4800만 원의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 갔다. 안 씨도 당시 안현수한테는 그 돈밖에 없었을 것이고, 러시아 가서 한동안 월급을 못 받다가 소치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른 후 러시아 빙상연맹으로부터 포상금과 주택, 차량을 지급받았다고 이해했다.
안현수 가족. 사진 출처 = 안현수 인스타그램
“현수가 러시아 가서 이런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드린 돈은 나를 뒷바라지해주신 데 대해 보답한 것이라고. 앞으로 자신의 돈은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이해했습니다. 현수도 가정을 꾸렸으니까요. 그런데 한 번은 사업 자금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현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현수는 자신의 아내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고 이후 연락이 와선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를 전했었나 봐요. 아내가 나중에서야 제게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일로 아내랑 심하게 다퉜어요. 현수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너무 화가 났어요.”
양쪽의 입장이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안현수는 러시아대표팀 선수촌인 노보고르스크에서 동료 선수와 함께 생활하며 혼인 신고를 마친 아내를 위해서라도 돈을 모아야 했을 것이다. 한국의 가족들을 위해 더 이상 경제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거란 다짐도 한몫했다는 얘기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부모는 부모대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아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선 더 이상 아들에게 손을 내미는 게 자존심 상했을 터.
“현수를 운동시키면서 덕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사업만 잘됐어도 구차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죠. 현수도 한국에 있는 동안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안 씨는 자식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지금까진 입을 다물고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현수가 선수 생활 은퇴 후 러시아 빙상연맹의 코치직을 거절하고 한국으로 들어왔고(안현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은퇴한 건 맞지만 이후의 진로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밝혔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 보면서 인터뷰를 결심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잖아요. 잡아줘야죠. 서운함도 안타까움도 크지만 그래도 자식이잖아요. 아직 손녀 얼굴도 직접 보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현수가 먼저 연락해올 것이라 믿습니다.”
한편 안기원 씨와 안현수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쇼트트랙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전했다.
“안현수가 러시아에 갔을 때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연금도 나중에 받은 거라 생활이 힘들었다. 혼인 신고 후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집으로 돈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안현수의 아내 우나리 씨가 결혼을 반대하는 시부모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갈등의 폭이 깊어지면서 결국 봉합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가족 간의 문제를 제3자가 왈가왈부하기는 어렵다.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어 했던 안현수를 두고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이 먼저 은퇴를 발표했다. 사전에 상의가 됐는지 어떠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안현수도 자신의 거취를 두고 깊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안현수가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안현수와 전명규의 관계 아버지와 멀어질 때 빙상 대부와 관계 회복 안현수 아버지 안기원 씨는 안현수가 러시아에서의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스승인 전명규 한체대 교수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안현수의 스승이다. 대표팀 감독이었을 때는 물론 한체대에서도 스승과 제자의 연을 이어갔다. 두 사람 관계가 틀어진 건 안현수가 성남시청에 입단하게 되면서부터다. 전 교수는 당시 새로운 팀 창단을 준비하고 있었고 안현수를 데려가려 했다가 창단이 무산되자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창단팀을 기다리자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안현수와 아버지 안 씨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원하는 성남시청의 제안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라 성남시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성남시청 입단하자마자 부상으로 수술을 해야 했던 안현수는 이후 전 교수로부터 선수 생활 그만두고 한체대에서 코치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안현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울 거란 판단에 아버지에게 외국에서 뛰고 싶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여러 나라를 알아보다 러시아로 귀화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안 씨는 안현수가 결혼하게 되면서 전 교수가 다시 안현수에게 연락을 취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현수와 나 사이가 나빠지고 현수와 전 교수와의 관계가 회복됐다. 어떻게 해서 회복됐는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현수가 한국에 오면 한체대 빙상장에서 훈련했다. 그건 전 교수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다 올 초 러시아 언론에서 안현수가 러시아와 한국으로부터 코치직 제안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현수가 한국의 누구한테 코치직 제안을 받았겠나. 전명규밖에 없다. 한때 내가 전명규와 싸우는 걸 두고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고 말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결국 그 바위도 부숴지더라. 수많은 계란들로 인해 말이다. 난 현수가 올바른 판단을 하길 바란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곳은 러시아빙상연맹이다.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러시아에서 코치 생활을 이어가는 게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