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남규 삼성생명 탁구단 감독. 임준선 기자
“올해가 30주년이기는 한가보다. 요즘 부쩍 올림픽 이야기를 묻는 이들이 많다.”
30년 전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에 탁구 단식 금메달을 안긴 유남규 삼성생명 탁구단 감독은 또 다시 1988년 10월 2일을 떠올렸다.
2년 전 19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세계 1위 장자량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유남규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아시안게임 전까지 나는 세계적 수준의 선수가 아니었다. 부단한 노력 끝에 그 자리에 올랐다. 올림픽에서는 아시안게임 등 국제 경험도 쌓았고 자신감도 있었다. 준비 기간에도 노하우가 쌓였기에 효율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탁구는 88 올림픽이 돼서야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면서 “그래서 어릴 적에 올림픽에 대한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막연히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정한 목표가 있으면 달성 해내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4학년 때 본격적으로 탁구 라켓을 잡기 시작했다. 곧장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탁구 선수로서 최연소 국가대표, 세계 챔피언이 목표였다. 초등 5학년부터 매일 새벽운동을 했고 1년이 지나자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이 때 ‘국가대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잠시 탁구를 손에서 놓기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에 청소년 국가대표가 됐고 이듬해 최연소 국가대표 타이틀을 달았다. 고교 때는 스웨덴으로 약 1년간 탁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은 중국과 세계 1, 2위를 다투던 나라였다. 유럽은 힘의 탁구를 구사했는데 파워 있는 공을 1년간 받다보니 확실히 돌아왔을 때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86년 초 유럽에서 돌아온 그는 아시아선수권에 나서 북한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성과를 냈다. 이어진 아시안게임에서 1위를 할 땐 정말 세계챔피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남아있었다.
유남규 감독이 공개한 서울 올림픽 금메달. 그는 “원래는 기부를 했었는데 너무 소홀히 관리가 돼서 다시 가져왔다”고 밝혔다.
훈련을 하며 지내는 숙소 안에서도 온통 금메달을 따겠다는 의지 뿐이었다. 집중력을 유지하려 방 곳곳에 의지를 다잡는 문구를 써붙였다. “우리 어릴 때는 ‘하면된다’가 적힌 액자를 문방구에 많이 팔았었다. 그걸 사서 책상 위쪽에 붙여놨다. 침대 위로는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였고, 방문에는 ‘탁구대 앞에 서는 순간 황제가 돼야한다’. 이 세 문장을 보고 힘든걸 참아냈다”라고 설명했다. ‘황제’라는 문구에 대해서는 “그 당시 무협지를 많이 봐서 그렇게 썼던 것 같다”라며 웃었다.
저녁 운동까지 마친 시간에도 남아 추가훈련을 이어가는 열정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는 선배들이 소홀히 하던 전력 분석에도 열중했다. “분석실 같은 공간이 있었다. 과거 외국 선수들과의 경기영상을 찍었던 VHS 비디오가 엄청 쌓여있었는데 그걸 매일 돌려보며 상대 특징, 대응법 등을 손으로 적어가며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나름의 이미지 트레이닝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자기 전에 금메달을 목에 거는 상상을 했다”면서 “처음엔 막연했다. 훈련을 반복하고 자신감이 생기자 점점 뚜렷한 내 얼굴이 그려지더라. 금메달 따고 난 이후 부모님이 좋아하시고 내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까지 상상했다(웃음). 매일 밤 미소를 지으면서 잠이 들었다”고 말했다.
매일 밤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막상 시상대까지도 올랐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경기 마치고 도핑테스트까지 하고 선수촌에 돌아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는데 내 소식이 실렸다. 그제야 좀 실감이 나더라. 선수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훈련을 하던 체육과 숙소로 가는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졌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좋아해줬다. 지금의 아이돌 같은 느낌이랄까”라며 웃었다.
실로 아이돌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체육관 앞에는 100여명의 팬들이 찾아왔고 일일이 세기도 힘든 팬레터도 받았다. 그는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면 더했다. 모든 사람이 알아봤다. 부산에 있던 동생이 팬레터 답장을 대신 해주기도 했다. 자기가 유남규라고 생각했나(웃음). ‘유남규 집’도 유명해져서 도둑이 다섯 번이나 들었다. 나중엔 쇠창살을 설치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금메달 따고 7~8년간은 정말 매일이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릴 적 세운 목표가 최연소 국가대표와 세계 챔피언, 20대에는 스포츠 과학 교수, 30대에는 체육부 장관, 40대에는 기업인이 되고 50~60대에는 남들에게 베풀면서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20대에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면서 스포츠 의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 때는 시합 중에 물을 먹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 분야가 취약했다. 그런데 금메달 따고 군 혜택을 받으면서 5년 동안 국내에서 활동해야한다더라. 빨리 나가고 싶었기에 그럴 바엔 2년 군대를 가겠다고 했다. 나 때문에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장성들이 모여 회의까지 했다고 들었다. 결국 국내에서 지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했다.
유 감독은 “딸이 태어나며 성격이 달라졌고 지도 스타일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유남규의 외동딸 유예린 양도 탁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8월 열린 꿈나무 탁구대회 4학년부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탁구선수 딸을 둔 아버지 유남규는 “4학년인데 나랑 똑같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활동적이다. 축구, 골프, 피겨스케이팅 안 해본 운동이 없다. 너무 활동적이라 어릴 때부터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며 미소를 지었다.
유난히도 활동적인 딸에게 결국 탁구 라켓을 쥐어줬다. 비교적 늦은 나이(7~8세)에 시작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잘 자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지금 예린이가 11살인데 2년 뒤 도쿄 올림픽 때는 13살밖에 안 된다. 4년 뒤 파리 올림픽에 나가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21살이 되는 2028 LA 올림픽에 금메달을 따면 좋겠다. 21살이면 탁구 선수로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나도 21살 때 따지 않았나(웃음).”
마치 그의 유년시절 계획을 다시 듣는 듯 했다.
최근 각 종목에서 부녀 또는 부자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하고 있다. 유남규는 이와 관련해서도 바람을 드러냈다. “예린이가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다른 선수들과 엇비슷하다면 ‘유남규 딸이라서’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다. 예린이가 선수 생활을 하며 초등탁구연맹 이사직도 내려놨다. 논란이 생기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선수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서울올림픽 30주년특집(4·끝)-‘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 인터뷰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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