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부터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안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선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주요 출연진을 전부 아시안 배우로 꾸리고, 아시아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낸 코미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이런 열풍에 불을 지핀 기폭제가 됐다. 8월 15일 북미에서 개봉한 영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3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 자리를 차지했다. 백인 중심의 블록버스터에 치중된 미국 박스오피스 상황에서 아시안 배우들이 만든 영화가 이렇게 주목받기는 처음이다. 사실 아시안 배우들로 출연진을 꾸린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탄생하기는 ‘조이럭 클럽’ 이후 무려 25년만이기도 하다. 이런 열기는 한국계 미국인 가정을 배경 삼은 영화 ‘서치’의 흥행으로 이어진다. 미국을 넘어 한국에서의 성과는 단연 돋보인다. 그야말로 ‘역주행 흥행’을 거듭하고 있다.
# ‘서치’ 돌풍의 힘, 한국계 배우들
이제 할리우드 대작의 주연이나 세계적으로 성공한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에서 한국계 배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할리우드를 받치는, 또 하나의 힘으로 통한다. 이는 올해 늦여름 한국 극장가 최대 화제작으로 인정받은 ‘서치’의 흥행 돌풍을 통해 다시 한 번 증명되고 있다. 8월 29일 개봉 때만 해도 이렇다 할 시선을 끌지 못한 ‘서치’는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완성한 짜릿한 이야기로 입소문을 얻으면서 박스오피스 순위까지 역주행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200만 관객 돌파까지 이뤘다. 같은 날 개봉한 박해일·수애 주연의 ‘상류사회’를 가볍게 따돌렸고 추석 연휴를 겨냥한 ‘물괴’까지 위협했다.
‘서치’의 주인공 존 조. 사진=소니픽쳐스 제공
‘서치’는 주인공 존 조를 포함해 주요 인물을 한국계 배우가 맡았다.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는 아버지가 노트북과 휴대전화 메시지, SNS를 통해 딸의 흔적을 추적하는 내용. 기발한 아이디어로 주목받지만 국내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건 한국계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와 이를 완성한 배우들로 향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6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존 조는 사실 ‘서치’ 이전부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안 배우로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1997년 TV드라마 단역으로 출발해 미 관객이 열광하는 메이저 시리즈 ‘스타트렉’ 리부트에 2009년부터 참여하고 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탄탄대로만 걸은 건 아니다. 여전히 인종차별적인 역할 구분으로 잦은 논란을 빚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까지 존 조가 격은 어려움도 상당했다. 실제로 그는 ‘스타트렉’으로 내한했을 당시 “신인 때는 정형화된 동양인, 특히 중국인이나 일본인 역으로 많은 오디션을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꾸준한 활동을 통해 할리우드 안에서 자신의 길을 확고히 했고, 이를 넘어 아시안 배우들의 동반 약진을 이루는 데도 터전을 닦았다. 존 조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어거스트’ 열풍이 일어난 이유를 두고 ‘서치’ 개봉 후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할리우드는 그동안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이미 관객은 받아들일 준비가 됐지만 정작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이들의 시선은 백인 중심의 콘텐츠에 국한돼 있었다는 의미다. 그는 “할리우드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래서 할리우드 시장이 (‘아시안 어거스트’에) 좀 놀라지 않았을까 한다”며 “이를 기점으로 할리우드가 좀 더 작품을 선택하는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서치’의 또 다른 주연인 미셸 라, 사라 손, 조셉 리까지 전부 할리우드에서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닦아온 한국계 배우들이다. 저마다의 사연도 제각각이다. LA에서 수질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력을 가진 미셸 라는 최근 넷플릭스가 제작한 ‘길모어 걸스: 한 해의 스케치’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번 ‘서치’를 만나 인지도를 쌓았다. 사라 손과 조셉 리는 미국 활동을 전후로 한국에서 여러 도전을 거듭한 사실로도 주목받는다. 사라 손은 2006년 가수 가희, 손담비와 함께 걸그룹 에스블러쉬를 결성해 먼저 데뷔한 경력을 갖고 있다. 짧은 그룹 활동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조셉 리는 올해 4월 방송한 KBS 2TV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에 출연해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는 활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 이기홍·스티븐 연·산드라 오 향한 관심↑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돌풍과 ‘서치’의 한국 흥행이 맞물리면서 할리우드 혹은 미국 내에서 한국계 배우들의 활동이 새삼 주목받지만 사실 과거와 달라진 분위기는 최근 3~4년간 꾸준히 감지돼 왔다. 할리우드 주류 영화는 물론이고 전 세계 시청자를 상대하는 TV 드라마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한국계 배우가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올해 8월에 벌어진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워킹데드’ 시리즈로 세계적인 팬덤을 얻은 스티븐 연.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할리우드에서도 고집스럽게 한국이름을 쓰는 배우 이기홍과 ABC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로 세계적인 팬덤을 얻은 스티븐 연은 사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한국계 배우’를 향한 인식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이기홍은 10∼20대 타깃의 판타지 시리즈 ‘메이즈 러너’에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국내외에서 화제를 뿌렸다. 한국계 배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주연을 맡은 경우가 드물기에 그의 도전은 더 주목받았다.
스티븐 연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 봉준호 감독의 ‘옥자’ 등 한국영화로도 익숙하지만 현재 기준 ‘가장 유명한 한국계 배우’로 꼽힌다. ‘워킹데드’ 시리즈에서 영특하고 진중한 한국인 청년 역을 맡은 그는 드라마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이젠 할리우드에서 단독주연 영화를 내놓는 상황만 봐도 그의 위치가 짐작된다.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 산드라 오도 빼놓기 어렵다. 그는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에미상에 아시안 배우로는 처음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유독 아시안 배우에게 진입장벽이 높았던 에미상마저도 이젠 그 문을 열고 ‘아시안 어거스트’의 열기와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