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검찰과 경찰이 압수수색을 나간 기업들의 명단을 보면 화려하다. 재계 1위 삼성은 물론, 현대자동차와 SK, LG, 포스코, 신세계, KT, 부영, 대한항공(한진), 대림까지.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다 털었다. 하지만 대형 로펌들은 물론, 서초동 부티크 로펌들의 반응은 “장이 죽었다”는 하소연뿐이다. 오너가 구속됐거나, 구속될 위기에 처한 사건은 대한항공(한진)과 부영을 제외하면 없다는 게 그들의 푸념이다.
일요신문 DB
대기업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검찰과 경찰이 올해 들어 경쟁적으로 압수수색에 나섰기 때문.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경찰이 ‘작은 혐의’에도 전격적으로 압수수색에 나서면서 대기업이 느끼는 두려움은 상당했다. 30대 기업 중에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선 곳은 한진, KT, 포스코건설, 현대건설 등으로 과거 대기업 수사를 검찰이 전담했던 것과는 다른 흐름이다.
검경의 칼날을 맞은 곳들을 재계 순서대로 살펴보자. 재계 1위 삼성의 경우 검찰의 제대로 된 수사를 받는 곳 중 하나다. 삼성의 경우, 노조 와해 수사를 이유로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서비스 본사, 이학수 전 부회장 자택 등 20여 차례에 달하는 압수수색을 받았다. 수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검찰은 삼성전자는 물론,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에서 관여했다고 보고 윗선을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재계 2위 현대차그룹도 압수수색을 피해갈 수 없었다. 공정거래위원회 취업특혜 과정에서, 공정위 퇴직 간부를 불법 취업시켜줬다는 혐의로 현대차그룹 서울 양재동 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했다.
재계 3위 SK그룹은 드루킹 사건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받아야 했다. 포털사이트 네이트를 운영하는 SK컴즈가 네이버, 다음 등과 함께 ‘드루킹’ 사건 관련 수사를 받고 있고, 재계 4위 LG그룹의 경우 오너 일가의 100억 원대 탈세 혐의로 지난 5월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밖에도 갑질 파문에서 시작돼 5달 넘게 진행되고 있는 대한항공(한진) 역시 조양호 회장이 구속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 로펌들 ‘대한항공’ 말고는 호재 없어
이처럼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다 검찰이나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 대형 로펌들이 ‘장이 죽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왜일까. 바로 ‘오너’를 향한 예리한 수사는 최근 2년 동안에 비해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국정농단 사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던 오너들이 다 구속될 위기에 놓였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실제 구속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올해는 압수수색은 많지만 대한항공 사건을 빼고는 다 오너까지 연결 짓기 쉽지 않은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전방위적으로 턴다’는 느낌의 수사도 없고, 기업의 작은 혐의 하나만 확인하고 끝내는 수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로펌 입장에서는 지난해보다 매출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대형 로펌의 한 파트너 변호사가 풀이한 올해 시장 흐름이다. 올해 ‘큰 돈’을 내놓고 변호를 받은 기업은 검찰, 경찰, 관세청, 국세청 등 국내 사정기관들로부터 일제히 수사를 받은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정도밖에 없다는 후문이다. 앞선 관계자는 “100억 원 이상 로펌 선임에 비용을 지출한 곳이 노조 수사를 받는 삼성과 대한항공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로펌들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다른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요새는 서울중앙지검보다 금융 사건을 주로 전담하는 서울남부지검에 더 수임료가 센 사건들이 많다고 평가한다”며 “확실한 대기업 사건을 (의뢰인으로) 잡고 가는 게 아니라면, 언론도 안타면서 수임료도 센 경제, 금융범죄 사건이 재미가 더 좋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 인기가 죽은 것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한동훈 차장검사) 산하가 전부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에 올인했기 때문이다. 앞선 변호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은 검찰과 법원 간 힘겨루기를 하는, 판사들이 의뢰인인 사건이지 않냐”며 “50명이 넘는 판사들이 조사를 받았다고 하지만 정치인들처럼 돈이 안 되는 사건”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일요신문 DB
# 블록체인 업체 ‘변호 맡겠다’ 경쟁도
시장이 지난해만 못하다보니, 돈이 몰리는 곳에 자연스럽게 로펌들 간 경쟁도 펼쳐지고 있다. 언론의 주목도는 덜하지만 검찰이나 경찰이 사기나 횡령 등 범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 가상화폐, 블록체인 업계가 바로 그렇다.
올해 중순, 가상화폐 거래소로 엄청나게 돈을 벌은 한 업체에서 ‘향후 검찰 수사 대응 및 자문을 위한 로펌을 구한다’고 나섰다. 갑자기 로펌들이 달려들었다. 검찰에서 대형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수사에 적극 나선 상황이었기 때문.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변호사는 “정말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로펌이란 로펌은 다 와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로펌들도 정말 돈 냄새를 잘 맡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경쟁으로 선임료가 낮아져 몇몇 로펌은 먼저 포기하기도 했다, 기업 상대 프리젠테이션은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털어놨다.
# 서초동 부티크 로펌도 “국정농단 때가 좋았다”
대형 로펌이 다소 부진하면, 서초동에 위치한 부티크 로펌(특정 분야 전문 소형 로펌)은 상황이 더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게 서초동 법조인들의 하나같은 평이다. 통상 대기업 수사 대응은, 대형 로펌이 몇몇 소형 부티크 로펌과 함께 움직이는 구조다.
얼마 전, 서초동에 사무실을 차린 한 검찰 출신 법조인은 “초반에 너무 사건이 없어서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올해 검찰 수사가 법원을 향한 것 말고는 없어서 시장이 죽었다는 평가를 하더라”며 “대형 로펌들도 힘들다고 하는데, 자문보다는 형사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작은 로펌)들은 오죽하겠냐”고 설명했다. 또 다른 부티크 로펌 대표 역시 “국정농단 수사 때는 대기업들도 줄줄이 검찰과 특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몇몇 기업들이 특정 전관 출신 변호인을 원해서 10억 원 이상 벌어들인 (전관 출신) 변호사들이 꽤 있었다”며 “향후 경제 흐름이 좋지 않다고 하니 검찰도 기업 수사를 자제하지 않겠냐, 자연스레 로펌들 시장도 한동안 흐름이 좋기는 힘들 것 같다”고 내다봤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