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대표와 김무성 의원.
6·13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 후 보수 진영은 충격에 빠졌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압도적인 스코어로 민주당에 완패했기 때문이었다.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경북에서조차 힘겨운 싸움을 벌인 끝에 체면치레만 했다. 보수 정당 내에선 민주당 몇몇 인사들이 정권 초부터 얘기했던 ‘20년 집권’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됐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싸늘하게 돌아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뒤늦게 원인 분석 및 해법 마련에 나섰다. 그동안 주로 진보 진영에서 통용됐던 ‘분열은 필패’라는 얘기가 쏟아졌고, 양당 합당 필요성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모두 선거 완패에 따른 후폭풍에 휩싸였다. 일단 집안부터 추슬러야 했다는 얘기다.
자유한국당에선 참여정부 정책실장 출신의 김병준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원회가 출범했다. 선거 패배 ‘주범’으로 지목됐던 홍준표 전 대표는 외유길에 올랐다. 바른미래당은 당 최대주주인 안철수·유승민 전 대표가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났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안 전 대표는 정계은퇴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손학규 고문이 새롭게 대표로 취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흥미로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바른미래당과 자유한국당 몇몇 의원들이 모여 합당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구체적인 전략 수립에 나섰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에선 탈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복당파’가 합당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모임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의원들 역시 주로 복당파였다. 이 모임에 나갔던 한 자유한국당 의원의 말이다.
“일찌감치 합당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의원들끼리 몇 차례 만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뜻을 함께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으니 본격적으로 논의해보자는 뜻에서 만나게 됐다. 사안이 민감하다보니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여러 대화들이 오갔고, 또 부정적인 반응도 나오긴 했지만 합당이 불가피하다는 데엔 의견이 일치했다. 여기에 참여하겠다는 당내 의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합당이라는 큰 그림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합당 과정에서 중도 및 개혁보수 성향의 외부 유력 인사들을 영입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는 계획이다. 이는 ‘도로 새누리당’이라는 비판과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합당 추진 모임에 관여하고 있는 바른미래당 한 의원실 관계자는 “두 당이 합치는 것만으로는 무너진 보수를 재건하기 어렵다. 운동장이 너무 기울어져 있다. 민주당에 비해 사람도 턱 없이 부족하다”면서 “우선 합당이 최우선 목표지만 이를 넘어선 ‘빅텐트’를 세우는 게 관건이다. 시민단체와 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할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자유한국당에선 복당파가, 바른미래당에선 안철수 전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이 합당에 긍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복당파 좌장은 김무성 의원이다. 정치권에서 양 당 합당 논의 배후로 ‘김무성-안철수’를 지목하는 이유다. 일각에선 김 의원과 안 전 대표가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새롭게 출범할 당의 대표를 김 의원이 맡고, 안 전 대표는 차기 후보로 나선다는 게 골자다. 이에 대해 김 의원과 안 전 대표 측 모두 “너무 앞서 나간 얘기”라고 일축했다.
자유한국당(112)과 바른미래당(30)이 합치면 142석으로 원내 1당(민주당 129석)이 된다. 이 경우 문재인 대통령 집권 중후반기는 가시밭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권이 양당의 합당 논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민주당 의원은 “(합당이)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으면서도 “대선과 지방선거 연승으로 다음 총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분위기가 파다했지만 최근 문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위기감이 역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진영이 통합하면 파괴력을 무시하진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현실은 ‘산 넘어 산’이다. 합당 논의에 참여하는 인사들 대부분 이를 인정한다. 일단 당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특히 바른미래당 호남 의원들은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이 추진되면 ‘탈당도 불사할 것’이라며 강경한 스탠스다. 차라리 무소속으로 남거나 민주당에 합류하겠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국민의당 출신의 한 호남 의원은 “자유한국당과 같은 당에 소속된다는 것은 곧 정치 생명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호남 유권자들이 받아들이겠느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한국당 내에도 합당 모임 주축을 이루는 복당파에 대한 곱지 않은 기류가 여전히 팽배하다. 양당의 이런 속사정을 생각해보면 합당 과정에서 적잖은 이탈자가 생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오히려 민주당의 세만 더 불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합당 반대파들의 합류, 보수진영 통합에 대응하기 위한 정계개편 등을 통해 민주당 의석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호남 의원은 “민주당은 가만히 있겠느냐. 민주평화당과의 합당을 추진하려 할 것이다. 또 합당 반대파들을 영입할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민주당은 원내 과반을 넘길 수도 있다”면서 “어찌됐건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합당 움직임은 향후 정치권 지형을 흔드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점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