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강을 흐르다가 그는 정년퇴직을 했다. 은퇴한 그는 한국현실에서는 어린아이였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몽땅 사기 당했다. 그 돈은 아내와 둘의 노년을 지탱하는 생명줄이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북한의 핵개발로 세계가 들끓고 있을 무렵이었다. 국가는 정보전문가인 그를 다시 불렀다. 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북의 독재자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형을 독살하고 고모부를 말뚝에 묶어 240발의 고사총으로 쏘아 피와 살덩어리가 공중에 튀게 한 악마였기 때문이다. 병들고 굶어죽는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해서는 북한의 세습독재자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정규군은 북한의 도발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그는 북한 내의 반체제세력과 손을 잡고 김정은 제거공작에 나섰다. 독재자만 없어지면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 같이 개방되고 한반도는 자유복지의 따뜻한 사회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성공 일보직전에 그 계획이 발각되고 그의 실체가 노출되어 버렸다. 분노한 김정은은 조선중앙통신 등 모든 북한의 매체를 통해 남한에 있는 그를 꼭 처단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은 한국정부에 그를 넘기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가 계속 남쪽에서 존재할 경우라도 그의 생명줄은 끊어놓겠다고 선언했다. 바뀐 정권은 그를 어두운 감옥에 넣어버렸다.
팔십이 일 년 남은 노인이 된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평화무드인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의 행동이 시대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 년 전만 해도 한반도 주위에 미 항공모함이 배치되고 괌에서 비행기가 떠서 북을 초토화하겠다는 위협의 소리들이 돌아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독재자를 제거해 남북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그는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변호사를 오래 해 오다 보면 첩보전의 최일선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지금 시중에는 ‘공작’이라는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 한번 써 먹고 무책임하게 폐기해 버린 대북공작원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해외에서 북과 첩보전을 벌이다가 뒷골목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이 사회를 지켜준 이름 없는 영웅들이다.
내가 감옥에서 만난 노인도 북한의 김정은이 역설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해 준 애국자였다. 노인이 된 정보전문가인 그가 감옥 안에서 흘리는 하얀 눈물을 나는 보았다.
그는 또 다른 모습의 순교자였다. 사람마다 깊이와 질감이 있다. 그걸 인격이라고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격이 있어야 한다.
정치 상황이 바뀌었다고 인간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의 국정원장들이 모두 국고손실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다.
적폐청산의 차원에서 잘못이 있으면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한 건 그들에게 억지로 회계 관계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법률을 적용해서 감옥에 있게 하는 점이다.
보수정권 시절에는 보수의 입맛에 맞게 법이 적용됐다. 진보정권에서는 이념에 순종하는 형태로 죄형법정주의가 유린되고 있다. 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