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목 대표 “도가니 현장이 장애인권 신장의 역사적 장소로 쓰인다면 의미 있을 것”
[일요신문] 장애인 시설 내의 성폭행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빠짐없이 붙는 수식어가 있다. ‘제2의 도가니’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는 광주의 청각장애학교인 ‘광주인화학교’에서 발생한 장애학생 성폭행 사건을 다룬다. 2011년 개봉한 이 영화의 파급력은 상당했고, 5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오던 인화학교는 바로 이듬해 폐교 조치됐다. 이렇게 도가니라는 이름은 세상에 남았지만 정작 인화학교의 근황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아예 학교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교가 문을 닫은 지 6년이 지난 지금, 인화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옛 인화학교 교지를 직접 찾아 현재 상황 및 앞으로의 계획을 알아봤다.
현재 인화학교 건물에는 기존에 있던 ‘광주인화학교’라는 현판이 없다. (위) 광주인화학교 (아래) 기숙사 건물. 사진=박혜리 기자
9월 20일 오전 방문한 인화학교는 학교 현판이 모두 떼어진 채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텅 빈 학교에는 관리인 한 명이 근무 중이었다. 2015년 1월 인화학교 재산이 2년 간의 법적분쟁 끝에 시에 귀속되면서 광주광역시에서 관리인을 파견한 것이다.
광주광역시청 관계자는 “낮에는 관리인이 감독하지만, 밤에는 보안장치를 통해 문제가 생겼을 때 인근 파출소에 연락이 가도록 조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본관, 학교 내 복지시설(기숙사)인 인화원, 세탁실 등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건물들은 문이 잠긴 채로 그대로였다. 광주시청의 허가를 받고 기자가 학교 내부로 들어가자 예상했던 폐교의 모습이 펼쳐졌다. 눅눅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고 바닥과 천장은 물이 흥건했다. 교무실에는 각종 서류, 메모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신상정보를 담은 입학 상담 일지까지도 그대로였다.
인화학교 관리인은 “기숙사, 교실, 교무실 등 건물 내부에 신발, 서류 등 아직 많은 물건이 남아 있다. 현판은 학교 측에서 나갈 때 떼어간 걸로 알고 있다”며 “밤에 공포체험 같은 걸 하기 위해 학교 내부로 무단 침입하는 일반인들도 있어 인근 파출소에 몇 번이나 연락이 갔었다. 요즘엔 간혹 성인이 된 인화학교 졸업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화학교가 폐교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내부에는 아직 많은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박혜리 기자
겉으로 보이는 인화학교는 아직 6년 전에 머물러 있지만 변화를 위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현재 광주시는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인화학교 용지에 4538평(1만5000㎡) 규모의 장애인 전문 수련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2016년 인화학교 부지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TF가 구성되면서 장애인 인권 기념관, 장애인 수련시설, 농인복지관, 직업재활시설을 아우르는 인권복지타운 건립이 추진됐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6개월에 걸쳐 인권복지타운 건립을 위한 타당성 용역이 진행됐다.
하지만 연구용역 결과 인권복지타운 추진에는 여러 제약이 뒤따랐다. 일단 5500평에 불과한 교지에 네 가지 시설을 모두 유치하기엔 평수가 부족했다. 또 현행법상 장애인 수련시설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에 대해선 국고보조금 지급이 제한됐다. 결국 올해 3월 광주시는 인권복지타운 대신 장애인수련시설 건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광주시청 관계자는 “휠체어 통로, 점자 표시, 수화통역사 등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과 전문 인력이 종합적으로 갖춰진 수련시설이 전국에 단 한 곳도 없다. 복지부에 ‘왜 이런 시설이 없느냐’고 묻자 너무 예산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라면서 “용역 결과 인화학교는 워낙 외진 곳에 있어 복지관으로 적합하지 않기도 했다. 리모델링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건물은 신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광주시가 추진하는 장애인 수련시설은 지상 4층, 지하 1층짜리 건물로 객실, 식당, 강당, 체육시설, 수영장, 목욕실, 소극장 등이 포함된다. 특히 도가니 사건을 기억하며 장애 인권 침해의 경각심을 고취하자는 취지로 인권기념관은 필수적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인화학교 부지 내 세탁실. 영화 ‘도가니’에서도 등장한 세탁실 폭력이 자행된 공간이다. 사진=박혜리 기자
인화학교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힘썼던 이들도 장애인 수련시설의 건립이 사건을 지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에 뜻을 같이 한다. 인화학교 성폭력 대책위원회 대표인 김용목 목사는 “몇 년 전 일본에서 농학교 교장 선생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날 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자신의 가슴에 대더라. 영화를 보고 삼지창으로 심장을 찔리는 아픔을 느꼈다는 거다. 그런 감수성을 가지신 분이 교장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며 “(장애인 수련시설과) 우리나라 장애 인권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이 되길 바란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삶이 어떠했고, 어떻게 장애 인권이 신장되어 왔는지를 말이다. 도가니 사건의 현장이 그런 장소로 변한다면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광주시의 장애인수련시설 건립 계획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460억 규모의 예산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지난해 국회,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를 방문해 인권복지타운 건립을 위한 국비 확보에 나섰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다만 최근 장애인수련시설 건립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기재부와 복지부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시 관계자는 “일단 시에서는 예산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국회에 방문해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며 “만약 장애인수련시설이 건립된다면 연간 15억 정도의 운영비가 들 것으로 예상한다. 전액 무료로 시설을 개방할 수는 없지만 이용객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에서 이용료의 상당 부분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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