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주최한 행사에 시민들이 참여해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금재은 기자
2010년 생명존중과 생명운동을 하는 프로라이프의사회는 낙태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고발했다. 의료계는 이를 계기로 낙태수술이 더욱 음지화됐다고 보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낙태수술을 해 주는 병원을 알려달라고 애원하는 글들이 우후죽순 올라와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임신유지가 힘들다는 결정을 내린 시민들은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 발품을 팔고 애원해야 한다. 불법이기 때문에 의원마다 수술비용 책정도 제각각이다.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먹는 낙태약’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임신중단약 ‘미프진’이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미프진 경우 임신 초기 복용하면 수술 없이 임신중단을 유도할 수 있다. 미프진은 1988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스웨덴, 독일, 미국 등 61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2005년부터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해 안전한 인공중절 방법으로 공인했다. 의약계에 따르면 임신중절 수술 성공률은 98%, 미프진은 95~97%로 안전성도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미프진이 국내에 도입되지 않아, 정식 의약품인지 검증되지 않은 미프진이 온라인에서 우후죽순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온라인에서 미프진을 판매하는 곳은 10여 개에 달한다. ‘국내 당일 배송’ 등으로 홍보를 하며 약을 판매하고 있는데 일반인으로서는 약 성분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는 위험이 있다. 판매처들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데,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40만~50만 원 사이의 고가로 시세가 형성돼 있다. 전문의 상담 없이 약을 복용하는 데 위험이 따라 의료계에서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미프진 구매가 증가하자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는 성명서를 내고 미프진에 대한 복용방법을 배포했다. 성명서에는 “법적으로 임신중절을 막든, 막지 않든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해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 비율은 거의 동일하다”며 “이미 임신중절을 선택한 혹은 선택할 그녀들은 충분히 고민했고, 충분히 아파했고, 충분히 고통 받고 있다. 박카스를 먹듯이 미프진을 가벼운 마음으로 먹을 그녀들이 과연 존재하겠는가? 이제 이미 충분히 아픈 그녀들을 위한 더 안전하고 더 효과적인 방법을, 우리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낙태수술을 하는 당사자, 수술을 집행하는 의료인, 불법약 판매자까지 낙태에 대한 부담은 모두 개인에게 전가한 채 국가는 뒷짐만 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정부는 낙태수술에 관한 문제에 방관해왔다. 그 가운데 보건복지부가 지난 8월 낙태수술을 한 의료인에 대해 자격정지를 하는 의료법 규칙을 시행한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죄 책임을 여성과 의료인에게만 묻는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의당도 “낙태죄 폐지 촉구 목소리가 거세지는 시국에 오히려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는 보건복지부의 행태에 유감”이라는 브리핑을 내놨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는 성명을 내고 낙태수술 중단을 결정했다. 의사회는 “수많은 인공임신중절수술이 이뤄지는 현실에서, 불법 수술의 원인이나 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여성과 의사에 대한 처벌만 강화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정부는 당장의 입법미비 해결에 노력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의사에 대한 행정처분을 유예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9월 29일에는 시민단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이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행사를 개최했다. 269명의 참가자가 숫자 269 모양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낙태죄 폐지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로운 시민 참여가 가능했던 이날 행사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여자가 다양했으며, 행사 막바지 낙태죄 폐지 구호를 외칠 때는 행인까지 이들의 구호에 힘을 실어줬다.
모낙폐에 따르면 형법 제269조에서 규정하는 낙태의 죄는 1912년 일제의 의용형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임신 당사자의 임신중지 결정은 처벌하며, 우생학적 목적에 부합하는 임신중지는 허용해왔다. 낙태죄 존치의 역사는 곧 국가가 인구관리 계획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 도구로 삼아 생명을 선별하려 했던 역사다. 더 이상 국가의 필요에 따라 모자보건법 안에서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허락받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낙태죄 폐지나 형법 개정에 대한 요구가 크지만 반대 목소리도 있다. 프로라이프의사회 차희제 회장은 “무조건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미혼모차별법을 비롯해 각종 제도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며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생명권 존중을 위한 제도를 만든 뒤에도 낙태가 필요하면 그 경우 낙태죄를 손질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고 있다. 9월 전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견됐지만 임기만료로 재판관이 교체되며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이 유보됐다. 재판관 교체로 낙태죄에 대한 재심리나 위헌여부 결정 시기는 오리무중이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