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가치가 저평가된 회사에 투자하거나 사들인 후 기업 가치를 높여 되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들에 대기업집단에서 밀려난 회사는 좋은 투자처다. 대기업집단에서 밀려난 회사의 일감은 사모펀드가 인수한 이후에도 유지되는 덕에 해당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노력이 비교적 수월하다. 여기에 금융위원회(금융위)가 국내 사모펀드의 자금 물꼬를 터주는 제도 개편에 나서기로 해 사모펀드의 기업 인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사모펀드들은 최근 대기업이 내놓은 계열사들의 매각 협상 대상자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부분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응하려는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계열사다. 실제 SK그룹과 LG그룹이 각각 추진하는 SK해운, LG서브원 소모성 자재구매부문(MRO) 사업부 매각에 이미 사모펀드가 인수 주체로 나선 상태다.
SK해운은 그룹 지주회사인 SK㈜가 57.22%의 지분을 가진 비상장사로 공정위가 마련한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 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공정위가 총수 일가 지분이 20% 이상인 계열사와 그 계열사가 지분을 50% 넘게 보유한 자회사도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새로 포함한 탓이다.
서울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에 대한 의견수렴 공청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SK해운은 국내 사모펀드 한앤컴퍼니가, LG서브원 MRO 사업부는 국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인수 의사를 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앤컴퍼니는 지난 3월 CJ그룹 임원 차량을 공급하는 조이렌트카가 공정위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지정되자 곧장 인수에 나서기도 했다. 조이렌트카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 CJ그룹 회장 일가가 소유한 회사였다.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보유 중이던 부동산 개발회사 SK D&D 지분(24%)을 사모펀드에 넘긴 것도 공정거래법 개정에 따른 선택이었다.
전문가들은 공정위 규제가 사모펀드 시장 규모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이 올해 중점 추진 사항으로 대기업집단 일감 몰아주기 해소를 밝힌 올해 상반기,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사모펀드는 총 25조 3746억 원(완료 기준)을 거래했다. 전체 M&A 시장 규모가 32조 2900억 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사모펀드는 전체 거래서 80%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다. 2014~2017년 사모펀드가 M&A 시장에서 차지한 연평균 비중 37%의 2배다.
김종민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 실장은 “공정위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로 계열사를 통째로 팔거나 일부 사업부를 쪼개서 매각하고, 총수 일가가 보유한 특정 회사의 지분을 정리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사모펀드 시장 자체가 커졌다”면서 “금융위가 지분 의무 보유나 의결권 규제를 폐지하고 경영 참여형 또는 전문 투자형의 구분도 없애는 사모펀드 개편안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사모펀드의 역할은 지금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앞서 금융위는 경영 참여 목적의 사모펀드라면 기업 지분 10% 이상 확보, 6개월 이상 보유, 대출 금지 등 규정을 지키도록 한 현행 규정을 올해 하반기 중 개정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국내 사모펀드 투자 고객 모집 가능 인원도 ‘49인 이하’에서 ‘100인 이하’로 늘어 국내 사모펀드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도 확대할 전망이다. 국내 사모펀드의 이른바 기업 사냥이 더욱 수월해지는 셈이다. 또 공정위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로 사모펀드의 사냥 대상 기업도 늘어난다. 실제 공정위가 낸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이 오는 11월 정기국회를 통과하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은 지난해 231개에서 607개로 대폭 증가한다.
한상원 한앤컴퍼니 대표이사 사장(왼쪽)과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사진=각 사 홈페이지
문제는 사모펀드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실효성을 높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공정위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한 데는 총수 일가 사익편취 해소와 일감의 중소기업 확장이란 측면이 동시에 고려됐다. 총수 일가가 대기업집단 내 정보통신(IT), 물류, 부동산 관리, 광고 등 업무를 내부 거래로 독식하지 말고 중소기업 같은 외부 기업들과 나누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펀드에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기업을 매각하는 것은 일감의 외부 확장과 관계가 적다. 한앤컴퍼니로 넘어간 조이렌트카 주요 업무가 CJ그룹 계열사 임원에 대한 차량 대여로 동일한 상태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사모펀드가 대기업의 규제 대상 기업 매각에 인수자로 정해지는 것은 사모펀드와 대기업 간 이해관계가 맞기 때문”이라며 “사모펀드가 공정위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회사를 사면 사모펀드는 안정적인 일감을 기반으로 회사 가치를 키워 나중에 되팔 수 있고, 대기업은 사모펀드가 사간 기업을 되팔 때 정권 분위기 등을 보고 다시 집단 안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바이아웃 펀드라 불리는 기업 가치 증대 후 지분이나 자산 매각 등 투자 방식이 국내 사모펀드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도 일감 몰아주기 규제 실효성을 막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실제 국내 유력 사모펀드 운용사 대표는 대부분 정·재계 인맥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한앤컴퍼니 한상원 대표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사위다.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은 박태준 전 총리의 사위다. 이상훈 모건스탠리PE 대표는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의 장남, 구본웅 포메이션8 파트너스 대표는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손이다. 이에 일각에선 사모펀드의 역량 강화가 일감 몰아주기 해소에 미칠 영향은 적고 도리어 사모펀드 이익 확대에만 기여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사모펀드의 역량 확대는 기업 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주주가 많아진다는 것이고 기업은 주주의 가치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된다는 의미”라면서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라는 것도 결국 사익이 아닌 주주의 이익에 집중하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국내 사모펀드 중에는 사익 목적 투자도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가치 제고에 노력하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