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엎어야 돼.’
사내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솟구쳤다. 가슴 속에 천하를 품고 있는 자신을 핍박하는 세상이 야속했다. 시골의 작은 서당조차 헐어버린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내는 삿갓을 비스듬히 올려 쓰고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잿빛 하늘 어디에도 새 세상이 열릴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천명(天命)이니 하늘의 뜻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리라. 동북면의 무장이라고 해서 새 세상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였다.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 통이 큰 사내였다. 그의 휘하에 쟁쟁한 무장들이 있으니 의탁해 볼만했다. 그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찾아가는 길에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비웃듯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장이라고 해도 학자에게 학문을 배워 문리를 깨우친 인물이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시정의 부랑배가 아니었던가. 유방이 천하제일의 책사인 장량(張良)과 명장인 한신(韓信)을 만나지 못했다면 중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고려는 500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탱해 왔으면 왕기가 쇠했을 법하다. 이제는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야 한다. 사내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었다.
동북면 함주로 가는 길은 빗속에서 고즈넉했다. 사내는 노랫가락을 읊듯이 시 한수를 외우며 휘적휘적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5년에 세 번이나 집을 옮겼는데
금년에 또 이사를 하게 되는구나
들은 넓은데 띠집은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산은 길게 뻗었는데 고목은 쓸쓸하구나
밭가는 사람 서로 성 물어 보고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 버리네
천지가 능히 나를 받아주려니
표표히 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
이가(移家)라는 제목의 시였다. 1382년 10월,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집의 이 사내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가장 유능한 책사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382년에는 오고 갈 곳이 없는 초라한 유랑자에 지나지 않았다. 정도전은 당대의 대학자인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정몽주, 이존오(李存吾), 김구용, 김제안, 윤소종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출중하여 동료들의 선망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강론했다. 1375년(우왕 1) 당시의 권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377년에 간신히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그 곳 출신의 권력자가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왕씨 성을 가진 재상이 별장을 만들기 위해 집을 강제로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정도전은 1382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고 있는 길이었다. 정도전이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5년 동안에 세 번이나 집을 이사했는데 그것도 권력자들의 횡포에 의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 조정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성계 대장군의 막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정도전은 수많은 깃발이 펄럭이는 함주의 막사에 이르자 군사들에게 물었다.
“누군데 대장군님의 막사를 찾는 것이오?”
군사들이 정도전의 위아래를 살피면서 물었다.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대장군님에게 술 한 잔을 얻어먹고 싶어 왔다고 전해 주시오.”
“이 사람이 제 정신인가? 우리 장군님이 어떤 분인데 술을 얻어먹겠다는 거야?”
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대장군이 내가 왔다가 그냥 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들은 경을 칠 것이오.”
“뭘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이름 석자만 가지고 대장군님을 뵙겠다는 말이오? 공연히 귀찮게 하지 마시오.”
“전 성균관 박사 정도전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군사들은 정도전의 초라한 몰골을 살핀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성계보다 먼저 달려나온 것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 먼 곳까지 오실 줄 몰랐습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대는?”
정도전이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살폈다. 소년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했다.
“이방원(李芳遠)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고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년 영웅이로군. 이 장군님의 몇 째 자제입니까?”
“다섯째입니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이방원은 함주로 출정하기 전에 개경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성계의 아들 중에 가장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392년 정도전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방원이 구출하고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서로가 적이 되어 치열한 대립을 했다.
“호랑이 새끼에 고양이가 없다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입니다.”
“과찬입니다. 제가 아버님께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공손하게 안내하여 이성계의 대군영으로 데리고 갔다. 이성계는 정도전이 왔다고 하자 깜짝 놀라서 군영 밖으로 달려 나왔다.
정도전과 이성계. 그들은 군영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이 마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탐색하듯이 오랫동안 살폈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이성계였다.
“정공(鄭公), 정공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오?”
이성계가 탐색을 끝낸 듯이 정도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핫핫핫! 송구스럽지만 천지를 유랑하다가 지쳐서 장군께 의탁하려고 왔습니다. 이틀을 굶고 먼 길을 왔는데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정도전은 제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성계에게 거침없이 음식을 요구했다.
“잘 오셨소. 잘 오셨소.”
이성계는 반갑게 정도전의 손을 잡고 대군영 막사로 들어갔다. 이성계의 휘하 막장들은 초라한 몰골의 정도전을 이성계가 환영을 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막사로 들어간 정도전은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지시하여 술과 음식을 차리자 고맙다는 말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이성계의 휘하 막장들은 정도전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웅성거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남루한 옷차림에 귀인다운 풍모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장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과 술을 다 먹은 뒤에 피로하다면서 이성계의 침상에서 쿨쿨거리고 잠을 잤다.
“장군님, 저자가 뭘하는 작자인데 감히 장군님의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입니까?”
조영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성계에게 물었다.
“시건방진 작자입니다. 장군님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 동북면 무장들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저런 놈은 몽둥이로 두들겨서 내쫓아야 합니다.”
이성계의 무장들인 조영규, 이지란(李之蘭), 조영무, 고부 등이 불만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이들은 훗날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할 때 행동에 나서는 장수들이고 이지란은 남송의 명장 악비장군의 후손이었다. 악비장군이 역적 진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후손이 고려에 귀화하여 이지란 대에 이르러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편장이 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소리들 하지 말라. 내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은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장군님, 성균관 박사라면 서생 아닙니까? 서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핫핫핫! 우리는 이제 호발도(胡拔都) 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계의 말에 무장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호발도 군은 여진으로 동북면 일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의 군대가 토벌하러 온 것이었다. 이성계는 포용력이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의 휘하에 쟁쟁한 무장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무용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포용력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기꺼이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였다. 이성계의 대군영에는 무장들 밖에 없었다. 글을 아는 장수들이 더러 있다고 해도 천하를 경영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사서오경을 읽고 병서에도 통달했다.
고려는 누대에 걸친 부패와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조정은 무능하고 지도자들은 비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는 한 마디로 난세이고 난세는 혁명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정도전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이성계였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그것은 용이 여의주를 문 사건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