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님, 어찌 이러십니까? 너무 난폭하지 않습니까?”
계집이 얼굴을 찡그리고 투정을 부리듯이 소리쳤다.
“흐흐… 너를 볼 때마다 춘심이 동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느냐?”
사내가 계집의 가슴을 덥석 움켜쥐고 보료 위에 쓰러트렸다.
“밖에서 아랫것들이 듣겠습니다.”
“들으면 대수냐?”
“백관이 영공(令公)이라고 부르는 분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원나라에서는 나를 권왕(權王)이라고 부르지.”
사내가 낄낄대고 웃으면서 계집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에그….”
계집은 어쩔 줄을 모르고 앙탈하는 시늉을 했다. 허겁지겁 달려드는 사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벌겋게 밝은 대낮인 탓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거친 손이 가슴을 애무해오자 계집은 자신도 모르게 낑낑대면서 사내의 민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내 방안이 열기로 가득해지고 계집의 신음소리가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사내의 이름은 신돈(辛旽).
고려 조정의 최고 실력자였다. 계집은 신돈의 심복인 기현의 후처로 과부로 지낼 때부터 신돈과 사통하던 사이였다. 그녀가 기현의 후처가 되고 기현이 신돈의 심복이 되자 두 남녀는 기현의 안방을 차지하고 노골적으로 음행을 저질렀다. 기현은 자신의 후처가 신돈과 사통하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었으나 신돈으로 인해 권세를 누리는 것만을 좋아하여 분노하지도 않고 수치스러운지도 몰랐다.
신돈은 영산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신돈의 처음 이름은 편조였으나 훗날 공민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신돈으로 개명했다. 신돈이 고려의 조정을 좌지우지 하게 된 것은 공민왕이 전폭적으로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거사께서는 과인의 사부가 되어 국사를 다스리는데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공민왕이 김원명의 소개를 받고 신돈과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공손하게 말했다. 신돈은 고담준론에 박식했고 스스로 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이 청산유수와 같아서 공민왕은 신돈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다.
“신은 재주가 없어서 임금의 스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돈은 짐짓 사양하는 체했다.
“주문왕은 위수에서 강태공을 만난 뒤에 스승으로 삼아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거사께서는 부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
공민왕이 신돈에게 절을 하면서 간곡하게 청했다. 신돈은 해지고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공민왕은 그가 청수하고 탈속하여 불법이 높은 고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돈은 글자를 쓸 줄도 몰랐다. 젊었을 때는 떠돌이 중노릇을 하면서 불법을 전한다고 허황된 말로 과부들을 유인하여 닥치는 대로 간음했다. 글자도 모르면서 불법이 높은 고승으로 행세하고 안에서는 비단 옷을 입었으나 밖에서는 해진 옷을 입고 다녀 공민왕을 감동시켰다.
“신이 국사가 되면 반드시 참소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소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과 대신들은 참소하는 말을 잘 듣는다고 하는데 어찌 좋은 정사를 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인이 서약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서약서까지 써주었다.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하느님이 증명하실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써준 서약서로 고려사 열전 편에 있는 기록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사랑했다. 공민왕이 왕자 시절에 원나라에 인질로 들어가서 숙위를 하고 있을 때 원나라는 공주와 공민왕을 혼인시켰다. 노국공주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후원으로 왕자의 신분에서 충정왕을 밀어내고 왕이 되어 고려로 돌아왔다. 1365년 노국공주가 딸을 낳다가 죽자 공민왕은 비통해 하면서 국사를 오로지 신돈에게 위임했다.
승려의 신분이 높은 탓에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요승들도 많았다. 고려 명종 때의 요승 일엄(日嚴)은 스스로 부처라고 칭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을 낫게 할뿐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다.”
일엄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현혹했다. 일엄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찾아왔다. 그는 젊은 여자들을 동굴로 불러들여 부처가 현신하여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면서 사통했다. 그러는 동안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들은 동굴 밖에서 기도를 하면서 부인이 생불에게 선택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일엄이 먹다가 남긴 음식이나 목욕한 물을 얻기만 하면 한 방울이라도 천금처럼 생각하여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발을 씻은 물이 법수(法水)라고 하여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전주의 중 일엄이 눈 먼 사람을 볼 수 있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전라도 안찰사 오돈복이 고려 명종에게 아뢰었다. 명종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일엄을 도성으로 불렀다. 일엄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개성의 백성들이 생불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절을 했다.
그가 개성으로 들어올 때에 채첩건을 쓰고 박마를 타고는 능선으로 낯을 가렸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이 그가 탄 말 머리를 가로막았으므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역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있는 기록이다. 명종은 일엄을 보현원과 홍법사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개성에 있는 관리들과 백성들이 일엄이 있는 홍법사로 몰려와 길이 메워지고 개성 시가지가 텅 비었다. 절에 모인 사람들이 1만여 명으로 그들이 아미타불을 외치자 10리밖에까지 들렸다. 고려의 내로라하는 조정대신들의 부인과 딸까지 수풀처럼 모여서 머리카락을 길바닥에 길게 늘어트리고 일엄이 발을 딛게 했다. 일엄은 개성의 수많은 부녀자들을 유린하고 재물을 거두어들였다. 명종은 그가 고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강남으로 보냈다.
신돈은 명종시대의 요승 일엄과 같은 자였다. 공민왕은 음식이나 버선을 신돈에게 하사할 때 반드시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존경을 표시했다.
“나라를 어지럽힐 놈은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승경이 혀를 차면서 비난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비호로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지나치게 총애했다. 강직한 무장인 서북면도순찰사 정세운이 신돈을 죽이려고 하자 공민왕이 숨겨주기까지 했다.
“최영과 이구수 등이 군신을 이간하고 선량한 인재들을 배척하였습니다.”
신돈이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들을 무고하여 그들을 국문했다. 잔인한 국문이 계속되자 최영 장군 등은 거짓으로 자백했다. 신돈은 그들의 작호를 박탈하고 농토와 노예들을 빼앗았다.
신돈이 최영을 무고한 것은 김란의 딸 때문이었다. 신돈이 조정의 권세를 한 손에 쥐고 흔들자 서북면병마사를 지낸 김란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바쳤다.
“어찌 자신의 딸까지 중에게 바치는가? 권세가 그토록 탐이 나는가?”
최영이 김란을 비난했고 신돈은 이를 고까워하여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켰다가 국문을 하여 귀양을 가게 만든 것이다.
기현의 후처와 한바탕 운우지정을 나눈 신돈은 김란의 집으로 갔다. 김란의 두 딸이 황급히 신돈을 맞아들였다.
“술상을 들이라.”
신돈이 김란의 딸들에게 말했다.
“부처께서 어찌 술을 드십니까?”
김란의 딸들이 눈웃음을 쳤다.
“나는 생불이니 술을 먹어도 상관이 없고 고기를 먹어도 오히려 도가 높아질 뿐이다.”
신돈은 김란의 딸들을 무릎에 앉히고 유쾌하게 술과 고기를 먹었다.
공민왕은 후사가 없었다. 그는 노국공주가 죽은 뒤에 왕비를 책봉하기 위해 왕의, 안극인, 정우, 정양생의 딸을 간택했는데 신돈이 같이 앉아서 간택을 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지극히 떠받들어 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다. 하루는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갔을 때 시중을 드는 여종이 마음에 들어 통정했다. 여종의 이름은 반야였고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훗날 우왕(禑王)이 되어 신돈의 아들이냐, 공민왕의 아들이냐는 논쟁을 낳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