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혼인을 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에 정비(定妃), 혜비(惠妃), 신비(愼妃), 익비(益妃) 등 4명의 왕비를 두었으나 역시 소생이 없었다. 공민왕이 신돈의 사가에 행차했다가 낳은 아들 모니노(牟尼奴)가 고작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사형에 처한 뒤에 반야의 아들 모니노를 궁으로 불러들여 우(禑)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모니노를 신돈의 아들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수군거리자 공민왕도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하여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자제위에는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 고려 귀족의 아들들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공민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공민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신의 네 부인을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하려고 했다. 공민왕은 이들을 총애하면서 자신의 부인을 간통하라는 영을 내렸다.
“폐하, 어찌 이런 망극한 영을 내리십니까?”
홍륜 등은 경악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민왕의 요구는 터무니없이 황당했다. 이 무렵 공민왕은 거의 미치광이 같은 광태를 부렸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조리 참수할 것이다.”
공민왕이 술에 취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홍륜 등이 공민왕을 살피자 핏빛으로 붉은 눈에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홍륜 등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대답했다.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첩은 죽어도 폐하의 영을 따를 수 없습니다.”
공민왕의 부인인 정비, 혜비, 신비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 명을 따르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일국의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민왕은 화를 벌컥 내고 이들을 쫓아버린 뒤에 익비를 침전으로 불렀다.
“네가 나의 영을 따르겠느냐?”
공민왕이 익비에게 물었다.
“어찌 폐하의 영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익비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그렇다면 홍륜과 침전에서 동침하라. 네가 아들을 낳으면 나의 왕자로 삼을 것이다.”
“폐하!”
익비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공민왕이 황음한 짓을 자주 저지르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공민왕을 쳐다보았다.
“네 나의 영을 따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이와 같은 망극한 영을 내리십니까? 이는 죽어도 따를 수 없습니다.”
“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공민왕이 칼을 뽑아들고 익비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익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공민왕의 눈이 핏빛으로 충혈되고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명을 따르겠느냐? 죽겠느냐?”
익비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르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민왕은 미치광이처럼 홍륜, 한안, 김흥경 등을 시켜 익비를 간통하게 했다.
“인도가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왕이 형벌을 주고 은전(恩典)을 베풀어 벼슬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일을 항상 간사한 소인들과 의논하고, 충신을 버리니 장차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대전보마배행수(大殿寶馬陪行首) 조준(趙浚)이 탄식했다. 조준은 고려말에 간신들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한 뒤에 이성계와 밀접하게 지내기 시작해 훗날 조선 건국의 1등공신이 되는 인물이다.
이날 이후 홍륜 등은 공민왕의 명이라고 하면서 수시로 익비의 침실을 드나들었다. 김종서가 편찬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공민왕은 정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고려사절요는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다.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뒤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고려를 부정적으로 기술한 점이 많다.
공민왕은 밤이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여자의 옷을 입는 기행을 일삼았다. 시녀들 중에 젊은 여자들을 방안에 들여보내고 검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에 홍륜 등에게 간통하게 하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면서 좋아했다.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은밀하게 공민왕에게 보고했다. 1374년 9월의 일이었다.
“내가 일찍이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는 것을 염려하였는데 익비가 이미 아기를 배었으니 내가 무슨 근심이 있으랴."
공민왕이 기뻐하면서 최만생에게 말한 뒤에 다시 물었다.
“누구와 관계하였느냐."
“홍륜이라고 익비가 말했습니다.”
“내가 내일 창릉(昌陵)에 배알하고 술주정을 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라. 너의 가족에게는 크게 상을 내릴 것이다."
공민왕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최만생은 공민왕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공민왕이 자신까지 죽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최만생은 공포에 떨면서 두려워하다가 그날 밤에 홍륜 등에게 알렸다.
“우리는 왕의 영을 따랐을 뿐인데 어찌 죽이려고 하는가?”
홍륜도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홍륜은 자제위의 동료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그러나 왕이 죽이려고 하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공민왕을 시해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공민왕이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시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독이 든 술을 마시게 하고 홍륜 등이 달려 들어가 칼로 난자해 순식간에 살해했다.
“자객이 밖에서 들어왔다!”
홍륜과 최만생이 궁 안을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때 조정의 수반은 이인임(李仁任)이 맡고 있었다. 그는 공민왕이 시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대궐을 장악했다. 위사들은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충혜왕의 왕비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가 10세 된 우를 데리고 들어왔으나 공민왕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시중 경복흥(慶復興)과 함께 종친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인임은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우를 왕으로 세웠다. 이인임은 처음에 공민왕이 신임하고 있던 중 신조(神照)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하여 의심했다. 그러나 침전의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피가 뿌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옥에 가두고 국문했다. 최만생은 처절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홍륜과 함께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들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하라!”
이인임은 최만생과 홍륜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한안, 권진, 홍관, 노선과 그들의 여러 아들을 목 베어 머리를 매 달고, 가산을 적몰했다. 처와 첩들은 관비로 삼았다. 그들의 친척들은 곤장을 때린 뒤에 귀양을 보냈다. 고려 조정은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고 이 과정에서 이인임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왕이 보위에 오르지 않았을 적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여 백성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 쏠렸었다. 보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했다.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공신과 현인을 내쫓고, 토목의 역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사고 못된 젊은 아이들을 가까이하여 음란한 행동을 방자히 했다. 무시로 술에 취해 측근 신하를 구타하고 또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책봉하여 대군으로 삼았다. 외인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밀리에 어린 소년들에게 지시하여 후궁의 몸을 더럽혔다. 후궁이 임신하게 되자 관계한 자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으니 패란(悖亂)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사관이 공민왕에 대해서 내린 평가다.
홍륜과 간통한 익비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익비가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이를 죽여야 합니다.”
집의 김승득이 글을 올려 익비 소생의 아들을 죽이자고 청했다.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우왕이 명덕태후의 뜻을 받들어 허락했다. 익비가 오랫동안 숨겼다가 내놓았는데 딸이었다. 이인임은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하도록 하고 그 동안 배척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郎)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 외교정책을 일제히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이인임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
이인임은 최영, 지윤 등과 합심해 이첨과 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 이숭인, 정몽주, 임효선 등을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인임은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 임견미, 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아 고려를 무너트리는 데 일조를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