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의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항상 군왕들이 장수들을 의심한다. 우왕과 최영은 막강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이성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승패를 확신할 수 없는 요동정벌군에 이성계를 내세운 것은 그의 군대를 소모시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이성계의 군대가 명나라군과 싸우다가 승리하든지 패하든지 전력 손실을 입는 것뿐이었다.
노회한 장군들의 전략은 이 부분에서 불꽃을 튀긴다.
왕과 최영은 이성계를 출정시키면서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 훗날 정종이 되는 이방과, 이두란의 아들 이화상을 우왕과 최영이 지휘하는 성주의 전시사령부에 배속시켰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키면 그의 두 아들을 죽이려는 음모였다. 이성계의 아들들은 최영의 인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방원은 전리정랑(典理正郞)으로 개성에 있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대군을 이끌고 회군한다는 소식이 최영에게 날아온 것은 반란군이 이미 성주 가까이에 쇄도하고 있을 때였다. 최영은 깜짝 놀라 이성계의 아들들을 잡아들이라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이성계의 아들들이었다. 이방우, 이방과, 이화상은 최영이 군사들을 보내 군영으로 오라는 영을 내리자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아버지가 회군하고 있다. 우리는 아버지의 군영으로 가야한다.”
이방우가 긴장하여 이방과와 이화상에게 말했다. 그들은 수하 몇 명과 함께 최영이 보낸 군사들과 혈전을 벌인 끝에 최영의 군진을 빠져 나와 이성계에게 달아났다.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습니다.”
최영은 우왕을 모시고 황급히 전시사령부가 있는 성주에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최영과 우왕이 도망치듯이 개성으로 돌아오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파죽지세로 평양을 지나 개성까지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력이었다.
이성계의 반란군 못지않게 빠르게 움직인 인물이 이방원이었다.
이성계는 부인이 둘이었다. 정실부인인 한 씨는 포천 재벽동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 씨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다. 이성계가 포천에 집을 둔 것은 동북면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최영과 우왕이 허겁지겁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개성을 탈출하여 포천으로 달려갔다. 포천의 집에는 벌써 노복(奴僕)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뒤였다.
“어머니, 속히 달아나야 합니다.”
이방원은 어머니 한 씨와 강 씨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날 무렵에는 벌써 관리들이 삼엄하게 기찰을 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밤을 이용하여 이동하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서 유숙했다. 자신들의 세력권인 이천(伊川)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 100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했다.
“최영은 일을 환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원은 나이가 어렸으나 가족을 지켰다.
개성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대군이 몰려오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한 개성의 백성들이 다투어 산으로 달아났다. 개성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6월 1일, 이성계는 개성의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을 치고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 앞에 진을 쳤다. 최영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어에 나섰다.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평시에는 공론이 활발하다가도 전투가 벌어지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조정이었다. 고려의 조정 대신들은 권력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집으로 달아나서 대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고려 조정은 순식간에 텅텅 비었다.
‘조민수가 어찌 이성계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최영은 조민수가 이성계를 견제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탄식했다. 조민수에게 이성계를 감시하라고 맡겼는데 오히려 그에게 가담한 것이다. 이성계의 반란군과 최영의 정부군은 성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소인이 선봉이 되어 공격하겠습니다.”
이성계의 부장 유만수(柳曼殊)가 청했다. 이성계는 빙그레 웃으면서 허락했다.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돌아올 것이다.”
유만수가 출정하자 이성계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침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반란군과 정부군은 선인문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화살이 비 오듯이 날고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유만수의 군사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선인문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최영이 비록 늙었으나 고려 최고의 명장이었다. 이성계가 예측한 대로 유만수는 과연 변변하게 싸우지도 못하고 최영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조민수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조민수의 군사들이 일제히 정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만수의 군사를 격파한 최영은 영의서교 쪽으로 달려가 조민수의 군사와 맞섰다. 조민수는 흑색 깃발을 앞세우고 영의서교 쪽을 공격하고 이성계는 황색 깃발을 앞세우고 선인문을 공격했다. 최영은 조민수의 군사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최영의 부장 안소(安沼)는 이성계를 맞아 싸웠다.
“도성에는 오합지졸뿐이다. 돌격하라!”
이성계가 칼을 들고 말 위에서 호령했다. 이성계의 군대는 고려 최강의 군대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선인문을 돌파하고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으로 올라갔다. 최영의 휘하 안소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남산을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달아났다. 이성계의 군대는 정예병이라 안소의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대라(大螺: 큰 소라. 나팔)를 불었다.
부우우웅….
소라 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개성 곳곳으로 퍼져갔다. 이성계의 소라 소리에 최영의 군사는 사기를 잃고 이성계의 군사들은 사기가 높아졌다. 성안의 백성들이 이성계의 군대를 환영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술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대접했다. 백성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최영의 군사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언제든지 승자 쪽에 붙는 것이 민심이었다.
이성계의 군사들은 최영의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최영의 군사들은 공포에 질려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아아 고려 500년 사직이 여기서 끝나는가?’
최영은 이성계의 군사들을 막을 수가 없자 비통했다. 하늘이 고려를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인문을 돌파한 이성계의 군사들은 고려 왕궁을 수백 겹으로 포위했다.
‘오오 난군이 왕궁을 포위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군사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왕은 영비(靈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궁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최영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달아나서 대궐이 텅텅 비었다. 곽충보(郭忠輔) 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냈다. 이성계는 왕궁을 점령했으나 팔각전으로 난입하지는 않았다.
“폐하, 옥체를 보존하소서. 옥체를 보존하시면 반드시 설욕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의 부하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최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왕에게 절을 올렸다.
“경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경은 나를 버리지 말라.”
우왕이 울면서 최영을 만류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최영은 우왕에게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대의(大義)에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 거병했습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이성계가 비통하게 말했다.
“그대가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최영이 울자 이성계도 마주보고 울었다. 이성계는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시켰다. 최영은 이후 합포와 충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가 공료죄(攻遼罪: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으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에 참수되었다. 최영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했으며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
최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영이 제거되자 고려는 이성계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내가 이성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왕이 밤에 환자(宦者: 내시)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죽이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으나 그들이 모두 전문(殿門)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성계는 내시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한 우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성계의 부하들이 우왕을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이성계는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우왕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 뒤에 강화로 쫓아 보냈다.
이성계는 고려 최고의 학자인 이색(李穡)에게 문의하는 시늉을 하고 불과 9세인 우왕의 아들 창을 고려의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