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집 앞에서 남북정상회담 판문점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사진기자단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안의 표면적 대립 구도는 ‘조약이냐, 신사협정이냐’다. 전자라면 헌법 제60조 1항에 따라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신사협정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이 판문점선언의 비준 동의안을 반대하는 논리도 이 지점이다. 헌법학자 출신인 정종섭 한국당 의원은 “헌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라며 “우리가 법률로 정해도 북한에 강제력이 없다”고 밝혔다. 같은 당 윤상현 의원도 “판문점선언이 법적인 합의문이냐”라며 “정치적 선언문은 국회 비준 대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남북 간 구체적인 권리의무를 명시하지 않은 점도 논란거리다. 4·27 판문점선언의 대다수 조항은 강행규정이 아니다. 예컨대 판문점선언에서 남북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지만, 적대행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얘기다. 국회 비준 시 북한에는 강제성이 없는 이 같은 조항이 우리 쪽에만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는 셈이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넓은 의미로 보면 정치적 선언도 조약에 포함된다.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2조에는 ‘문서의 명칭에 관계없이 서면의 형식으로 단일의 문서 혹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관련 문서에 구현되며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를 조약으로 규정했다. 판문점선언이 조약에 준한다고 판단되면, 국회 비준 절차를 거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국가의 재정적 부담이 불가피한 점도 국회 비준 동의에 힘을 싣는다. 근거는 남북관계발전법 제21조 3항이다. 이 조항은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합의서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남북합의서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애초 더불어민주당이 편 논리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판문점선언은 재정이 들어가는 사업”이라며 “국회 비준을 받아야 원활하게 처리될 수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디테일에서 불거졌다. 청와대는 9월 7일 나흘 후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다고 발표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전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조치였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을 비롯해 소득주도성장론 등을 둘러싼 대치 국면에서 보혁 갈등의 정점인 판문점선언까지 겹치면서 여의도는 ‘지뢰밭 정국’으로 돌변했다.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극한 대치 속에서 여야는 9월 10일 “정쟁화하지 말자”며 평양 정상회담 후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을 논의키로 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9월 11일 문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2986억 원의 비용추계서가 담긴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안의 심의·의결을 강행했다. 이 선언을 채택한 지 138일 만의 일이다.
보수 야당은 격앙됐다. “일방적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 요구는 국회를 무시하는 것”(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 “국회와 야당을 압박하려는 정치적 술수”(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야권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오래전부터 이를 기획한 게 아니냐”고 날을 세웠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청와대 여민1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는 지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항을 다 담아서 국회 비준을 받도록 준비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정치 상황이 바뀌더라도 합의 내용이 영속적으로 추진된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이 이를 발판 삼아 정권연장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는 분석과 궤를 같이한다. 20년 집권론을 던졌던 이 대표는 지난 9월 방북 전 ‘50년 집권론’을 주창했다. ‘이해찬밖에 안 보인다’는 평가 속에서 나타난 자신감으로 읽힌다. 한국당 내부에선 “일당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손학규 대표도 “대한민국 말아먹겠다는 얘기”라고 힐난했다. ‘샤이 보수’(숨어 있는 보수층)를 업고 정권탈환을 노려야 하는 보수 야당이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에 반대하는 이유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도 “남북문제가 지체될 경우 야권도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아 동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야당의 반대에도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계의 장기집권 열차는 이미 경적을 울렸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 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급등했다. 경제 실정으로 실기한 지지율을 단숨에 복원한 셈이다. 향후 정국주도권이 흔들릴 때마다 남북 등 외교 이슈로 지렛대 삼아 난국을 돌파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국내법적 효력을 장착하는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까지 성공한다면, 남북 관계를 활용한 정국 주도권 전략 수립에는 청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 예산 및 법률 지원에 숨통이 트여서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 들어 제2차와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은 6·13 지방선거와 추석 연휴 직전 열렸다. 보수 야당이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좁은 협치가 사실상 물 건너갈 수도 있다는 점은 딜레마다.
구도는 나쁘지 않다.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동의안을 둘러싼 구도는 ‘민주당(129석)+민주평화당(14석)+정의당(5석)’ vs ‘한국당(114석)’이다. 평화당으로 활동하는 바른미래당 비례대표 3명과 민중당 1명, 여권 성향 무소속 의원 2명 등을 더하면 의결 요건인 과반을 충족한다. 단일대오에 나선 진보진영과는 달리, 보수 야당에는 구심점이 없다. 30석의 바른미래당은 조건부 처리를 고리로 캐스팅보트에 나섰다. 김관영 원내대표는 “판문점선언의 비준 동의를 원한다면, 솔직한 비용추계 먼저”라고 밝혔다. 다만 당내 보수파인 바른정당 의원들이 비준 동의에 반대, 캐스팅보트의 위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이준석 최고위원은 “판문점 선언의 일례인 철도 부분만 봐도 경의선∼동해선 연결사업이 많게는 22조~37조 원까지 든다”고 주장했다.
다급한 쪽은 한국당이다. 서울 답방 때 김정은 위원장의 국회 연설까지 추진되는 상황이다. 이 국면에서 밀린다면,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실기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문재인 정부 집권 중·후반기는 물론, 차기 총·대선 국면에서도 주도권 확보가 쉽지 않다.
한국당이 꺼낸 전략은 ‘전선 넓히기’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실정 등을 제기, 판문점선언 등이 블랙홀 이슈로 격상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다.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이) 남북관계를 위기 돌파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며 “이런 식으로는 남북관계도 망치고, 민생 경제도 망치고, 여야 협치도 어렵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다만 남북 국회회담에 대해선 ‘원론적 찬성’ 입장을 밝혔다. 여권의 ‘평화 vs 전쟁’ 프레임에 걸려들지 않겠다는 전략적 행보로 분석된다.
여기에는 판문점선언이 ‘1차 관문’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막힐 것이란 자신감이 깔렸다. 외통위 위원 22명 가운데 민주당(8명)과 평화당(1명)은 9명에 불과하다. 반대파도 한국당(8명)과 무소속(1명)으로 동수다. 하지만 외통위원장은 한국당 소속인 강석호 의원이다. 무소속은 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에서 당 대표를 지낸 이정현 의원이다. 사실상 상임위 문턱조차 넘기기 힘든 상황이다. 외통위의 캐스팅보트도 2명(박주선·정병국)의 바른미래당 의원이 쥐고 있다. 박 의원은 국민의당, 정 의원은 바른정당 출신이다. 상임위부터 여야 기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정권은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하다”며 “남북관계는 여야 모두 상황을 보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
‘정치 9단’ 손학규, 한달 성적표는 글쎄… 바른미래당 손학규호가 10월 2일로 출범 한 달을 맞았다. 손학규 대표의 한 달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벼랑 끝으로 내몰린 당을 멈춰 세웠다. 다만 딱 거기까지였다. 반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8월 말 취임과 동시에 단독 드리블로 정치권 전체를 휘저었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좌클릭으로 존재감을 재확인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때 ‘국회 연설’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정치경력만 30년에 육박하는 손 대표의 중량감을 감안하면, 바른미래당의 존재감 미약은 뼈아프다. 서울대 재학 시절 빈민운동에 투신한 손 대표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난 뒤 서강대 교수를 거쳐 1993년 제14대 총선 때 원내에 진입했다. 현재는 올드보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바른미래당의 태생적 한계가 손 대표의 ‘약한 고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바른미래당은 호남 중심의 국민의당 일부와 영남권에 기반을 둔 바른정당이 만든 당이다. 합당 당시부터 ‘이종교배’ 시너지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호남은 2007년과 2012년 대선 때 불었던 ‘손학규 대망론’의 존립 기반이었다. 지금은 영남 보수층까지 껴안아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정치적 이슈마다 영·호남과 보수·진보 등 이질적 지지층 간 충돌로 번지는 이유다. 최근 당내 노선 투쟁을 촉발한 판문점선언의 비준 동의안을 둘러싼 논란도 이와 무관치 않다. 손 대표가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 동의안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뜻을 피력하자, 지상욱·이언주 의원은 각각 “당 정강·정책을 잘 모르고 나온 얘기”, “내부 의견수렴도 없었다”고 각각 비판했다. 손 대표는 “한반도 평화정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면서도 평양 남북정상회담 동행을 거부하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일각에선 손 대표가 바른정당계에 포위되면서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 원심력을 누를 만한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당 지지율은 제자리걸음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CBS 의뢰로 9월 27∼28일 이틀간 조사해 10월 1일 발표한 9월 4주차 정례조사 결과에 따르면 바른미래당 지지율은 5.7%에 그쳤다. 민주당(45.9%), 한국당(17.0%), 정의당(10.2%)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포인트, 응답률은 8.1%다. 그 밖의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