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주동자였던 정광민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자신이 당시 쓴 선언문을 가리키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남자는 1979년 고작 스물둘이었다.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이었던 그는 그해 10월 16일 친구들과 함께 유신철폐와 정권교체 요구가 담긴 ‘선언문’을 작성해 캠퍼스에 유포했다. 그가 던진 이 작은 불씨 하나는 부산대 캠퍼스를 넘어 주변 학교에게 옮겨 붙었고 부산을 뒤엎었다. 그리고 인근 도시 마산에도 그 불길이 번졌다.
남자는 곧 체포됐다. 시위 주동에 따른 긴급조치 9호 위반이 죄목이었다. 대가는 막대했다. 경찰들은 그를 거꾸로 묶어 물고문을 했다. 이른바 ‘통닭구이’. 중앙정보부는 이미 주동자들이 남민전 등 좌익과 연결돼 있다는 거짓 시나리오를 마련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남자에게 피난민 출신인 아버지가 고정간첩임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10·26사태까지 그 무지막지한 고문은 계속됐다.
사태 이후 풀려난 남자는 얼마 안 가 1980년 5·17쿠데타 직후 내려진 일체 검거령에 따라 또 다시 옥살이를 한다. 명목은 1980년 ‘서울의 봄’ 여파로 계속된 시위의 주동이었다. 하지만 부마항쟁의 꼬리표가 더 컸다. 이듬해 3월 석방될 때까지, 남자는 수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는 정광민 10·16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기자에게 직접 털어 놓은 자신의 이야기다. 기자는 정 이사장과 부산대 교정을 거닐며 여러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위의 시작점이었던 옛 상대 건물(현 자연과학관)과 옛 인문사회관(현 사범대학)을 지날 때, 그는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정 이사장 뒤에는 이후에도 ‘부마’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왔다. 복학 및 졸업 이후 정 이사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에서 민주화와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는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대 초 일본 교토대학 석사과정 입학을 시작으로 2005년 나고야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했다. 전공은 북한경제였다.
다행히 세상은 제법 변해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정 이사장은 국가정보원 산하의 국제문제조사연구소(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들어갔다. 과거의 운동권 행보에서 벗어나,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도 그에게 연구자의 길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구소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또 다시 그의 ‘부마’ 꼬리표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부마항쟁 이후 후배들이 직접 제작한 기념탑.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부마의 꼬리표는 정신적 트라우마와 함께 왔다.
“당시 나는 어린 아이였다. 처음 겪은 일들이었고, 무서웠다. ‘빨갱이’ ‘고정간첩’ 등 말들이 나를 압박했다. 고문 뒤 실신해서 동래경찰서 뒤 대동병원 응급실서 깨어났었다. 그래서 지금도 동래경찰서와 대동병원 앞만 지나가면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 게 수십 년 누적되면서 늘 무력감과 분노가 나를 감쌌다.”
결국 정 이사장은 다시금 고향으로 내려왔다. 결국 그 ‘부마’란 꼬리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부마특별법 제정을 위해 뛰었다. 2013년이 되어서 부마항쟁보상법이 드디어 제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법은 부마의 원흉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집권기에 제정된 셈이다. 이에 대해 정 이사장은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떤 의원이 그러더라. 지역에서 대통령이 두 명(김영삼, 노무현)이나 배출됐는데 아직 관련 법도 없냐고. 특히 노무현 정권 당시 부마 관련자였던 이호철 전 수석이 청와대에 있었다는 점은 더욱 아쉬웠다. 당시 노무현 정권은 6월 항쟁을 국가 기념일로 제일 먼저 제정했지만, 부마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섭섭했다. 결국 박근혜 정권 때 법이 마련됐지만, 이 때문에 총리실에 설치된 부마민주항쟁위원회는 제대로 된 조사권한 조차 갖출 수 없었다.”
부마항쟁 주역 정광민 이사장은 우여곡절 끝에 2015년 4월이 되어서야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과 헌법 전문 포함 언급 이후 지역에선 부마항쟁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다. 지난해 4월 정 이사장은 모교 근처에 연구소를 열었다. 지난 8월엔 송기인 신부를 이사장으로 한 부마민주화항쟁기념재단이 발족했다. 정 이사장 역시 재단의 이사로 참여 중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최근 정 이사장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올 초 변호사와 함께 그를 평생 짓누르던 고문에 의한 정신적 상이를 인정받고자 위원회에 ‘상이인정’을 신청했다. 그리고 최근(9월말) 위원회는 그에게 정신적 상이인정을 통보했다.
“그동안 위에선 정신적 상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 내가 고문피해자 중에선 첫 번째로 정신적 상이를 인정받게 됐다. 현재는 등급심사만 남은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다.”
정 이사장의 이번 정신적 상이인정은 부마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 과정에 있어서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갖는다. 1차적으로 관련자들의 피해는 겉으로 드러난 외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흔적을 찾기에 세월은 40여 년이 흐른 상황이다. 또 외상만큼이나 관련자들의 정신적 피해는 상당하다. 정 이사장의 정신적 상이 인정은 하나의 기점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정 이사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단언한다.
“부산대 학생조차 5·18은 알아도 부마항쟁은 잘 모른다. 부마항쟁의 성지인 부산대 캠퍼스엔 사진만 몇 장 걸린 기념관 하나와 소정의 기념물이 전부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 또 현재 부산과 마산(현 창원) 간 이견이 있다. 최근에서야 부마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기념일로 10월 16일을 확정했다. 내년 40주년 행사 장소를 두고도 부산과 창원 간 이견이 존재한다. 당장 국가기념일 제정에 힘을 쏟아야 한다.”
부산=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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