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즉위는 고려의 도읍 송도를 경악하게 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이성계가 왕조를 찬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으나 하급관리들이나 백성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이성계는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이 때문인지 송도에서의 반발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군사들이 삼엄하게 배치되어 계엄 하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송도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이튿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고 백관에게 명을 내려 고려 왕조의 정령(政令)과 법제(法制)의 장단점과 변천되어 온 내력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했다.
이성계는 고려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계획이었다. 이는 정도전 등이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생각이었다. 이들의 개혁 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승려들이 귀족 역할을 하면서 많은 폐단이 있었다.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장려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고려의 국성인 왕 씨들에 대한 처분이 대두되었다. 그들이 송도에 있으면 언제든지 빼앗긴 왕권을 되찾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헌부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국성 왕 씨를 송도에서 추방할 것을 요청했다.
“순흥군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은 나라에 공로가 있으며, 정양군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와 관은 장차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니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라.”
이성계는 왕 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보내라는 영을 내렸다. 실록에는 이성계의 영이 비교적 부드럽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는 왕 씨들을 몰살시키려는 음흉한 정책이었다. 송도를 비롯하여 전국으로 군사들이 달려가 왕 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추방되는 왕 씨들 중에는 송도의 왕족과 귀족들이 많았다. 이성계의 혁명군은 송도 앞바다에서 왕 씨들을 태운 배가 강화도를 향해 갈 때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수많은 왕 씨들이 억울하게 수장을 당해 원혼이 되었다.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찬탈할 때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신인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천상(高天祥), 중보(徐仲輔) 등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 두문동)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통곡을 한 뒤에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성계는 이들을 여러 가지로 회유했으나 두문동 충신들은 끝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때 이성계의 혁명군은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산을 불태울 때 타죽었다고 한다.
이들은 두문동 72현으로 불리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이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려 고조부는 목왕이라 하고, 부인 이 씨는 효비라 하였으며, 증조부는 익왕이라 하고, 부인 박 씨는 정비라 하였으며, 조부는 도왕이라 하고, 부인 박 씨는 경비라 하였으며, 부친 이자손은 환왕이라 하고, 어머니 최 씨는 의비라고 추존했다. 이어서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교지를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지난 7월 16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배극렴과 대소 신료들이 간곡하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했으나 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이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사양하기를 두세 번이나 하였다. 여러 사람이 또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청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에 의거하게 한다.”
교서는 정도전이 지은 것이었다.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것은 이 교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의 국성인 왕 씨가 아니었고 고려를 계승할 생각도 없었다. 이성계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그대로 둔 것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한 고도의 책략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계는 이런 점에서 무략만 있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왕조가 바뀔 때는 혁신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과 경제개발을 내세웠고 전두환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내세웠다. 김영삼은 군사독재 청산을 정권의 목표로 내세웠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에 의한 도학정치였다.
고려는 확실히 쇠락한 나라였다.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홍건적의 침략, 왜구의 침입 등으로 고려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는데도 왕실을 지키려는 부대가 없었다는 것은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계는 왕으로 즉위하고 한 달이 되자 왕세자를 세우기로 했다. 개국공신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왕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뒤였고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가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신의왕후 한 씨는 6남 2녀를 낳았고 신덕왕후 강 씨는 2남 1녀를 낳았다.
강 씨는 비록 두 번째 부인이었으나 상당히 정치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려의 권문세가인 강윤성의 딸이었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송도로 진출하면서 권문세가의 힘이 필요했고 강윤성은 신흥 세력인 이성계의 힘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정략적인 계산에 의해 강 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고려는 일부다처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부인을 두어도 상관이 없었다.
강 씨는 이성계보다 21세나 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단숨에 이성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 씨는 요염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녀는 정몽주가 해주에 있는 이성계를 죽이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방원을 보내 위기에서 구출하게 해준 책략가였다. 그런 강 씨가 이성계가 왕이 되고 자신이 왕비가 된 상황에서 세자를 책봉하는데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소첩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하루는 강 씨가 이성계에게 간드러지게 교태를 부렸다.
“핫핫핫! 그대는 송도 제일의 미인이오.”
이성계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공연히 말씀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무엇이 갖고 싶어 교태를 부리는 것이오?”
이성계는 강 씨를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
“세자입니다. 소첩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해 주십시오.”
강 씨가 더욱 애교를 부렸다. 이성계는 강 씨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이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방번은 교만했기 때문에 공신들이 이를 난처하게 생각했다.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이성계가 공신들에게 물었다.
“막내아들이 좋습니다.”
배극렴은 이성계가 강 씨를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말했다.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은 끝내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가 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가장 큰 실책이다.
이성계는 명나라에 국호를 정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황제께 아뢰오니 삼가 천자께서 재가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을 통해 이성계가 명나라에 올린 청이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과 화령에서 골라달라고 명나라 천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명나라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보냈다.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면서 조선으로 개국한다는 교지를 반포했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한상질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다. 실로 이것은 종사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이다. 지금부터는 고려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1393년 2월 15일의 일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조선의 개국은 1393년 2월 15일이 되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