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전 선발로 나선 류현진, 구단도 인정한 에이스
류현진이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로 예고되자 ‘야후스포츠’는 ‘stunner’라고 표현했다. ‘충격적인 일’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이라는 의미다. 현지 언론들도 커쇼가 1차전이 아닌 2차전으로 밀린 사실에 엄청난 관심을 쏟아냈다. 로버츠 감독이 류현진을 1차전 선발로 내세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평소 류현진을 ‘빅게임 피처’라고 자주 언급했던 로버츠 감독은 디비전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류현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류현진이 NLDS 1차전에 선발등판해 역대급 피칭으로 7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류현진이 포스트시즌 1선발 중책을 맡고도 잘 던지는지 보고 싶다. 지난해 건강하게 돌아왔지만 포스트시즌 로스터에는 들지 못했다. 그에게 상처가 됐다는 걸 잘 안다. 류현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붓고 증명하며 이 자리까지 왔다. 내가 본 이래 가장 좋은 투구를 하고 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길 기대한다.”
로버츠 감독은 커쇼가 아닌 류현진을 1차전 선발로 낙점한 것과 관련해선 “좀 더 이길 확률이 높은 선수를 기용하는 것이고, 커쇼에게 하루 더 휴식을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저스가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 커쇼가 아닌 다른 투수를 올린 것은 2009년 이후 처음 있는 일.
로버츠 감독의 선택은 감정이 배제된 성적만 놓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동안 커쇼는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9경기에 선발 등판해 7승7패 평균자책점 4.35다. 정규시즌의 통상 평균자책점 2.39에 비해 2점이나 높다. 시즌 막판 류현진의 성적도 좋았다. 최종 3게임에서 19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에서는 9경기 평균자책점이 1.15에 불과하다. 반면에 커쇼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5이닝 5실점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평균자책점도 2.73으로 마무리됐다.
# 류현진, 긴장하면서도 즐겼다
류현진은 네이버에 연재하는 메이저리그 일기를 통해 3일 야구장으로 출근했다가 허니컷 투수코치로부터 2차전이 아닌 1차전에 등판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류현진이 자신의 1차전 등판을 알게 된 시점은 3일이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타이브레이커가 열리기 전에 이미 구단으로부터 1차전 등판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그러나 류현진도 긴가민가했다고 말한다. 포스트시즌의 첫 문을 여는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선발은 항상 커쇼였기 때문이다.
타이브레이커의 승리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면서 디비전시리즈 직행을 확정한 다저스. 류현진은 구단 공식 휴식일인 3일 출근해서 훈련을 소화했고 이날 허니컷 코치로부터 등판 확정 소식을 직접 들었다. 류현진은 1차전 선발을 앞두고 긴장은 되지만 1회부터 전력 투구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경기를 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클레이튼 커쇼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류현진.
한화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류현진이 1차전 선발로 등판한 적이 있지만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1차전은 완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강심장답게 류현진은 정규시즌 때보다 더 빼어난 투구를 선보였고 7회 104개의 공을 던지고 이닝을 마무리했다. 더그아웃에서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내던 커쇼는 마운드를 내려온 류현진을 뜨겁게 포옹했고 격려했다.
# 불운했던 류현진, 노력으로 극복했다
류현진은 2015년 스프링캠프에서 왼 어깨에 통증을 호소했고 그해 5월 수술을 받았다. 어깨 수술을 받은 투수가 정상적인 투구를 선보일 가능성은 7%. 그런데 2016년에는 팔꿈치까지 말썽이었다. 또 수술을 받았다. 2017년 재활에서 돌아온 그가 마주한 현실은 5선발 후보군이었다. 다저스의 차고 넘치는 선발 투수들로 인해 마에다 겐타 등 5선발 후보들이 서로 부상자명단에 오르며 변칙 선발 등판을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했다. 급기야 류현진은 2017년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 6회 불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4이닝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빅리그 데뷔 후 첫 세이브였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불펜에서는 오승환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류현진은 포스트시즌 로스터에서 제외됐다. 2017시즌 성적이 5승 9패 평균자책점 3.77로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로버츠 감독은 류현진을 외면했다.
류현진도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포스트시즌으로 2017시즌을 꼽았다.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었어도 포스트시즌 무대에 서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터라 여운이 컸다. 선수들이 디비전시리즈에서 승리를 확정 짓고 축하 세리머니를 펼칠 때 류현진도 기쁨을 함께 나눴지만 마음 한편의 씁쓸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18시즌, 쾌조의 스타트를 보이며 시즌을 이어가던 그에게 또 다시 부상의 악몽이 드리워졌다. 이번에는 내전근 부상으로 3개월이 넘는 공백을 가졌다. 그럼에도 류현진은 15경기에서 7승 3패 평균자책점 1.97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지구 우승에 기여했다.
류현진의 강점은 거듭되는 부상과 힘든 재활을 거치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어느 선수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고 어느 선수보다 많은 훈련량을 감당했다.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재활훈련과 씨름하며 몸을 만들었다. 올해 내전근 부상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을 때도 2개월 후에는 마운드에 오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구단에서 류현진의 복귀를 천천히 진행시켰다. 덕분에 하체 위주의 재활 훈련을 반복하면서 어깨를 더 단련시킬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전화위복이 된 시간들이었다.
올 시즌을 마치면 류현진은 FA가 된다. 그래서 시즌 중에 겪은 내전근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류현진은 “수술이나 부상 이후에도 마운드에서 다시 오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한다. FA를 떠올리기보다는 다시 공을 던지겠다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버텨낸 것이다.
# 김인식 전 감독과 김선우 해설위원의 감탄
류현진은 5일 1차전 경기를 마치고 항상 그랬듯이 한국에 있는 스승, 김인식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류현진이 경기 후 김 전 감독에게 전화하는 건 등판하는 날마다 볼 수 있는 루틴이다. 김 전 감독은 살 떨리는 긴장이 엄습했을 무대에서 최고의 피칭을 선보인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류현진의 투구는 야구가 아니라 예술이었다. 안 맞으려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 피칭으로 맞섰다. 만약 그렇게 해서 맞게 될 경우를 대비한 차선책도 준비해놨을 것이다. 일반적인 투구 패턴이 아니었다. 정규시즌에는 이닝마다 강약 조절이 있었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매 이닝마다 사력을 다해 공을 던졌다. 그래서 94마일(151km)의 구속이 나왔다고 본다. 초반에 터진 홈런도 류현진한테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4점을 등에 업고 투구하는 건 투수한테 엄청난 힘으로 작용한다. 내 제자지만 나도 놀랄 정도로 오늘 류현진은 엄청난 공을 던졌다. 오늘 로버츠 감독은 류현진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1차전에 커쇼 대신 류현진을 낙점한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란 걸 증명해줬기 때문이다.”
김인식 전 감독은 류현진과의 통화 내용도 살짝 공개했다.
“내가 궁금했던 건 마운드에서보다 타석에서다. 현진이가 뉴컴이란 투수를 상대로 첫 안타를 쳤는데 그 공이 152km였다. 그렇게 빠른 공을 어떻게 쳐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동산고 4번타자였다며 웃음을 터트리더라. 경기 마치고 한국으로 전화를 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현진이는 등판한 날은 빠트리지 않고 전화를 해준다. 그 마음 씀씀이가 정말 예쁘고 고맙다.”
메이저리그 선배이자 류현진의 경기를 중계한 김선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류현진의 피칭 관련해서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류현진이 1회부터 전력 투구했다고 말했지만 전력 투구란 단순히 세게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완벽한 제구와 스피드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1차전에서 류현진은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했다. 무서울 정도의 차분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상대 타자에 대해 얼마나 치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했는지 투구 내용을 보면 훤히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대단한 선수다.”
김선우 위원은 류현진이 ‘빅게임 피처’로 불릴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고 말한다. 그건 국제대회의 출전 경험이다.
“류현진은 어렸을 때부터 국제대회에 자주 등판하면서 큰 경기 경험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빅게임의 무게를 온전히 질 줄 알았다.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의 류현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트시즌 한 경기는 정규시즌 두세 경기와 맞먹는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류현진이 애틀랜타전에서 보인 피칭에는 그의 야구 인생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보는 나도 경기 내내 가슴이 설렜고 자랑스러웠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완벽한 재기 뒤에는 ‘내조의 여왕’ 있었다 류현진은 지금까지 LA 다저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됐을 때, 그리고 다저스의 지구 우승이 결정났을 때 두 차례 샴페인 세리머니를 펼쳤다. 2013년 다저스 입단 후 줄곧 팀의 가을 야구를 즐기며 샴페인 세리머니가 익숙한 류현진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내 배지현 씨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배지현과 류현진. 사진=배지현 인스타그램 야구와 관련해서는 감정 표현이 인색한 류현진이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하는 포스트시즌에 대해 “앞으로 세 번 더 함께 샴페인 세리머니를 즐기고 싶다(디비전, 챔피언십, 월드시리즈 우승을 의미)”는 얘기를 전했다. 류현진이 올 시즌 완벽히 재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 배지현 씨의 존재가 크다. 류현진도 “아내가 없었다면 애리조나에서 재활하는 시간들이 매우 지루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포츠 아나운서 출신인 배 씨가 운동선수의 특별한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뒷바라지하면서 류현진을 적극 내조하고 있는 게 류현진한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배 씨는 자신은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주위에서도 인정할 만큼 류현진의 재기의 일등공신은 선수의 노력과 아내 배지현 씨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