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 용법 등을 담은, 세상에 한 권뿐인 책이다. 연합뉴스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한자가 우리말과 다른 글자이기에 백성이 배워 사용하기 어려운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다. 또한 세종 28년 음력 9월에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백성이 널리 익힐 수 있도록 창제 목적과 원리, 용법 등을 기록한 같은 이름의 해설서를 펴내는데, 이것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총 33장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지은 서문, 즉 세종 어제(御製)와 훈민정음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담은 글로 구성됐다. 이 예의 부분을 한글로 풀어쓴 것이 ‘훈민정음 언해본’이다. 국어 시간에 배우는 언해본의 서문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가 바로 세종 어제이다.
해례본의 본문에 해당되는 ‘해례’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자음과 모음에 대한 설명, 용법과 용례 등을 상세하게 담은 글이다. 정인지가 쓴 해례의 서문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던 집현전 학사들이 해례를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이 서문에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시기가 밝혀져 있어, 한글날의 유래가 됐다. 지금의 한글날(10월 9일)은 당시 훈민정음이 반포된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훈민정음은 조선 문자체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무엇보다도 한자로 쓸 수 없던 우리말을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됐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우리말과 완전히 달랐다. 이를 두고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자로 우리말을 적는다는 것은 네모난 손잡이를 둥근 구멍 안에 억지로 밀어넣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누구나 글자를 아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이후 한국인은 독특한 민족의 말을 완벽하게 적고 표현할 수 있게 됨으로써 민족문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훈민정음, 즉 한글이 걸어온 길이 순탄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양반 사대부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가장 큰 원인은 사대주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의 기록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 중신들이 한글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신들이 내세운 첫 번째 이유는 “중국을 섬기며 중화의 제도를 따라 글과 법도를 같이하는 때에, 언문을 창작하는 것은 대국으로부터 비난 받을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심지어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양반 사회에서 한글을 ‘암글’(여성들이나 쓰는 문자), ‘언문’(상말을 적는 문자)이라 속되게 부르고 비하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물론 율곡 이이처럼 훈사(잘못이 없도록 경계하는 글)를 한글로 번역해 한자를 모르는 아랫사람들에게 도리와 예절을 가르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한글을 천대시하는 흐름은 수세기 동안 이어졌다. 특히, 연산군 시절에 내려진 ‘언문 금지령’은 한글문화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다. 연산군은 자신의 무도함을 꾸짖는 내용의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이러한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1504) 7월 20일의 기록이다.
“앞으로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를 주라.”
연산군은 급기야 한글 서적까지 불태우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글과 관련된 많은 책들이 이 시대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시절에는 사신단으로 중국에 갔다가 중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역관 주양우를 처벌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벌어졌다(‘중종실록’ 중종 34년(1539) 11월 22일). 명목상으론 ‘기밀 누설’의 죄목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글의 존재를 대국인 중국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던 조선 조정의 사대 기류가 자리하고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러한 한글 수난사를 겪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자취를 감췄던 책 중 하나였다. 해례본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시기는 공교롭게도 일제가 한글 말살 정책을 펴던 강점기 때였다. 당시 일제는 ‘창씨개명령’을 내리고, 학교에서 조선어과목을 폐지하는 등 우리글과 문화를 없애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암흑의 시대에 해례본이 안전하게 보존돼 훗날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간송’(호) 전형필의 공로 덕분이었다. 그는 당대 거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우리 문화재를 모으고 지키는 데 바친 인물이다. 1940년 여름 어느 날, ‘간송’은 책 거간 상인으로부터 “경상도 안동의 한 고가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송은 책값을 1000원으로 제시한 이 상인에게 그 열한 배나 되는 1만 1000원을 내주고 해례본을 입수했다.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 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1000원은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8·15 광복 이후였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직후까지 어용학자들은 한글을 두고 ‘고대문자 모방설’, ‘몽골문자 기원설’, ‘화장실 창살 모방설’ 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글 창제의 원리가 담긴 해례본의 등장으로 이러한 갖가지 잡설을 한꺼번에 잠재울 수 있었다.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의 염원이 깃든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지난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책’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자료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