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인 신부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사진=박혜리 기자
송기인 신부의 사제 생활은 유신독재와 함께 시작됐다.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자 그는 자신이 사목하는 성당에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유신체제 철폐를 주장하다 경찰에 쫓겨 성당으로 도망 온 학생들을 숨겨주며 그 역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동안 수없이 경찰서에 드나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공포의 시대였다.
“유신헌법하에서는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모든 것에 조심해야 했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니 광주·서울에서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라며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 반면 부산·대구 쪽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큰 스트레스를 느꼈다. ‘왜 우리는 올바른 것을 주장하지 못하냐’는 것이다. 결국 부마항쟁도 그러한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밀양에 거주하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부산을 오갔던 송 신부는 부마항쟁 당시의 기억이 뚜렷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서면 로터리에 육교가 있었는데 그 육교 밑에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민간 청년의 머리를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무자비한 폭력이었다”고 회상했다.
부마항쟁이 이후의 민주화운동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송 신부는 ‘중요한 건 유신독재 체제를 종식했다는 점’이라고 단언했다.
“중요한 건 부마항쟁이 10·26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 시청 앞 육교에서 부마항쟁을 목격하고 청와대에 ‘이제 민심은 갔다. 더는 이 정권을 지탱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를 저격했다. 만약 김재규가 부마항쟁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박정희를 저격하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부마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결국 박정희가 정권을 계속 잡고 있었다면 결국 5·18민주항쟁도 달라지지 않았겠나.”
이러한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부마항쟁은 한동안 ‘부마사태’로 불리며 정치권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아직 국내 4대 민주화운동(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중 유일하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다.
“영남은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곳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부마항쟁을 건드리기 싫어했다. 부마항쟁의 뜻을 기리는 민주공원을 만들 때만 생각해봐도 뜻을 모으는 시민들과 달리 지역의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같은 영남이라도 마산의 경우에는 정치인들의 관심을 바탕으로 ‘3·15 의거 기념사업회’, ‘3·15 아트센터’ 등이 조성될 수 있었다.”
2013년 부마항쟁특별법이 통과되며 부마항쟁 진상규명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이 역시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2014년부터 3년 넘게 조사해 지난 2월 ‘부마항쟁진상보고서(초안)’를 내놓았지만 피해 관련자 조사가 부실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부마항쟁의 유일한 사망자로 거론되는 유치준 씨의 사망도 규명되지 못했다.
송 신부는 “피해 관련자와 시위 진압 세력과의 접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며 “당시 유치준 씨가 범일동 다리 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가 군인에 의해 살해했는지를 떠나 데모로 인한 사고로 희생된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 신부는 앞으로의 진상규명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현재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데 아마 조만간 통과될 거다. 강화된 개정법에 따라 관련자에 대해 청문회도 할 수 있을 거다. 기존 과거사 법 아래에서는 조사관이 (유신독재 당시) 지서장을 지내며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질문해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젠 강제 연행도 가능해질 거다.”
송 신부는 부마재단의 역할이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위 참석자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참석했는지, 누가 도피자들을 숨겨줬는지 등 부마항쟁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복원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기념일 날짜를 지정하는 문제를 두고 부산과 창원의 의견이 엇갈렸듯 재단이 각 지역의 뜻을 모으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당장 내년에 진행되는 부마항쟁 40주년 기념행사가 어느 지역에서 열릴지도 민감한 사안이다.
“별문제 아니다. 4·19혁명도 딱 4월 19일에만 발발한 게 아닌 것처럼 항쟁이 진행된 기간 중 가장 뜻있다고 생각되는 날을 기념일로 정했을 뿐이고 결국은 큰 문제 없이 결정됐다. (40주년 행사는) 앞으로 같이 논의를 해야겠지만 정 안 되면 부산에서도 하고 마산에서도 하면 되지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지금은 기념사업회가 부산과 창원에 각각 있고 내가 우스갯소리로 ‘김해쯤에 하나로 만들자’고 했지만 큰 갈등은 없다.”
송 신부의 선임을 ‘코드인사’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변호사 시절부터 알고 지낸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과거사 위원회와 부마재단에서 핵심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코드인사라는 얘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과거사위원회 위원장을 제안 받았을 때도 신부 신분이기도 하고 허리도 안 좋았기 때문에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하지만 당시 1000여 개의 인권·시민단체 대표들의 추천을 받았고 청와대에서도 ‘신부님께서 안 하시면 저 사람들이 데모하겠다는데 그러지 말고 받아주시라’고 해서 딱 한 번의 임기만 맡기로 했다. 이번에도 시민단체 측에서 두 번이나 찾아왔고 두 번 거절했지만 ‘시작은 해주셔야 한다’는 얘기에 자리를 맡게 되었지만 지금도 다른 분들이 하시는 일이 훨씬 많다.”
송 신부가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청와대에서 편안한 복장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박혜리 기자
송 신부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개인적인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 문 대통령을 꼽는다. 송 신부는 앨범에서 문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모두 편안한 복장이었다.
“그 사람(문재인 대통령)은 YS(김영삼 전 대통령)랑 스타일이 정반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YS는 곧바로 툭하고 대답을 한다면 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답하는 일이 없다. 말을 하면 고개를 끄떡이거나 ‘그렇습니까?’ 정도가 전부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멘토’ 송 신부는 현 정권을 어떻게 평가할까.
“최저임금 1만 원을 내건 선거 공약을 지키고 있듯 어려움이 있더라도 처음에 내세운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고 본다. 나 역시 원칙을 고수하라고 하고 싶다. 사람들은 그 공약을 보고 투표한 것 아닌가. 물론 고용주가 최저임금 1만 원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너무 성급한 비난이 많은 것 같다. 박근혜 정권에서 망쳐 놓은 외교관계, 남북관계를 회복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애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도 잘하고 있다. NLL에 대해서도 보수 측에서는 빨갱이라고 하는데… 공동구역으로 합의를 보면 되지 않나 싶은데 물론 전문가가 아닌 내 생각이다. 딴소리들이 많이 나오는데 적어도 딴소리가 많이 나오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송 신부와 인터뷰하고 있는 동안 TV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뉴스가 흘러 나왔다. 이를 보던 송 신부는 “4대강 사업, 자원외교도 다시 조사해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과거를 덮으면 편안하고 조용할지 모르겠지만 도약하지 못한다. 과거로 후퇴하는 거다. 썩은 물을 그대로 두면 더 크게 썩는다.”
밀양=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