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T 정책 결정을 위한 시민공론화위원회’ 오문범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오거돈 부산시장의 입장에서 ‘BRT’는 서병수 전 시장이 떠나면서 남겨놓은 골칫거리다. 오 시장은 취임과 함께 지난 2014년 착공 이후 줄곧 논란이 됐던 BRT 사업을 중단시켰다. 그러면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업 지속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이후 ‘BRT 정책 결정을 위한 시민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원회)를 꾸리고 자체적으로 정한 로드맵을 실행했다. 공론화위원회는 8월 8일 출범한 이후 64일간의 활동을 통해 시민대표로 선정된 시민참여단 141명의 의견을 모았다.
공론화위원회는 지난 10일 부산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간 논의한 결과를 발표했다. 공론화위원회 오문범 위원장은 이날 “부산시민의 대표인 시민참여단의 결론은 공사재개”라며 “부산시는 잠정 중단된 중앙로 내성~서면구간과 해운대 운촌삼거리~중동지하차도 구간의 공사를 다시 시작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공론화위원회는 회견 직후 부산시에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 부산시는 공론화위원회의 발표를 수용하고, 다음 날인 11일 BRT 공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시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 시민 의견이 확인된 만큼, 향후 BRT 사업 추진에 있어 사회적 갈등이 어느 정도 불식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부산시가 BRT 공사 재개에 나서자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먼저 부산시가 정책 결정의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시가 대안 수립이나 면밀한 분석 없이 BRT 사업을 전면 중단했다가 반대 여론에 직면하자 면피용으로 공론화 카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시민 대표로 뽑힌 시장이 자신의 몫인 정책결정을 시민들에게 맡기면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을 무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 다시 말해 국민들이 개별 정책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고 대표자를 선출해 정책문제를 처리토록 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에서 도출된 결과의 신뢰성에도 커다란 의문부호가 붙는다. 비전문가들이 모여 이해도와 세부 지식이 부족한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 보면, 비중 없는 새로운 정보에 일부 참여자의 마음이 흔들릴 공산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론으로 무장한 달변가가 어느 한쪽에 존재한다면 반대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공론화 과정은 이 같은 위험요소가 일부 드러난 것으로 여겨진다. 인과관계를 뚜렷하게 규명하기 어렵고 상호 간의 영향이 상당히 제한적일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번 공론화위원회에 참여한 시민 141명의 찬반 의견 비율은 시작과 끝이 확연하게 달랐다.
시민참여단 141명은 최초 공사재개 45명(32%), 공사중단 48명(34%), 모름 48명(34%)의 비율로 공론화위원회에 참석했다. 오리엔테이션과 TV토론회, 사전 자료집 학습, 1박2일의 학습·숙의 과정 등을 모두 마친 뒤에는 공사재개 61%(86명), 공사중단 39%(55명)로 나타났다.
도출된 결과에 ‘시민의 의견’이란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불과 100여 명이 모여 논의한 내용을 360만 명의 뜻으로 포장한다는 것은 절차상의 문제를 따지기에 앞서 지나치게 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부산시를 비롯한 부산의 공직사회 전체가 공론화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부산시는 BRT 외에 해수담수화문제도 공론화위원회 구성을 통해 논의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시는 한때 오페라하우스 건립문제도 공론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들었다.
여기에다 부산시 산하기관과 일선 구군들도 ‘부산형 공론화제’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부산시가 BRT 정책에 대한 시민공론화 과정을 두고 ‘정부에서 시행한 신고리 5·6호기, 교육정책에 대한 공론화를 제외하고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례’라고 자평한 대목은 공론화를 바라보는 시의 기본적인 인식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익명을 요구한 지역 여권의 한 관계자는 “대놓고 비판하기는 어렵지만, 오거돈 시장과 시당 지도부가 시정철학 없이 포퓰리즘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면서 “시장은 4년만 바라보면 되겠지만, 시당은 적어도 10년, 20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 쉬운 길만 걷고자 하는 자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고 말했다.
하용성 기자 ilyo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