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학가에 있는 한 약국에서 전문의약품을 처방전 없이 판매한다고 입소문이 났다. 병원을 찾고, 기다려 진료를 보는 불편함(?)을 건너뛰고 손쉽게 원하는 약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주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뭐든 A 약국으로 가봐”라는 말이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서울 대학가의 한 약국이 전문의약품을 처방 없이 판매하고 있었다. 금재은 기자
‘일요신문’은 12일 A 약국을 찾았다. 전문의약품으로 의사의 처방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후피임약을 요청했다. A 약국 약사는 묻지도 않고 사후피임약 하나를 내줬다. 크라운제약에서 나온 ‘쎄스콘’이다. 이 같은 사후피임약은 경구피임약보다 호르몬 함량이 10배 정도 높아 복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처방 없이 호르몬제나 스테로이드제 등을 판매하는 것이 환자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을 구매해 본 한 시민은 “사후피임약 처방을 받으러 병원에 가면 성관계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훈계하듯 해 불편함이 있다”며 “처방약을 약국에서 바로 사먹는 게 잘못인 줄은 알지만 해외에서는 처방 없이 판매하는 약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대학생들은 병원 진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도 A 약국을 찾는 이유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서울 시내에서 처방전 없이 전문의약품이 판매되는 사실에 경악했다. 처방 없이 구매한 쎄스콘에 대해 질의하자 산부인과의사회 관계자는 “호르몬제 중에서도 응급피임약은 반드시 처방이 필요하다. 이 약을 처방 없이 판매하면 안 된다”며 “서울 시내에서 전문의약품을 이렇게 쉽게 판매하고 있는 것이 충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전해 들은 대한약사회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6년 전 전문의약품의 유통 과정에서 산입산출량이 달라 약사계가 흔들렸던 적이 있다. 100%는 아니지만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며 “처방 없이 약을 파는 건 도서벽지의 일부 의약분업 예외지역에서나 가능하다. 나머지 지역에선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인근에 병원이 없으면 약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처방약을 판매할 수 있다. 단, ‘의약분업 예외지역’의 경우다. 의료기관과 약국이 충분치 않은 지역의 주민들이 처방전 없이 전문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다. 서울시에는 의약분업 예외지역에 해당되는 약국이 없다.
A 약국 약사는 “주변에 대학병원은 있지만 소형 병원이 많지 않아 주민들 편의를 위해 판매해 왔다. 인근에 소형 병원이 없으면 약사가 전문약을 조제해 판매할 수 있다”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앞으로 전문의약품을 절대 판매하지 않겠다”고 해명했다.
의약분업 예외지역에 있는 약국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도서벽지까지 원정을 가 처방전이 필요한 약품을 처방 없이 대량구매하는 행태가 만연한 것. 온라인에는 “발모제 사러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서울에서 멀지 않다”, “고교생인데 사후피임약 파는 약국 어딘가요” 등의 의약분업 예외지역 규정을 악용하는 사례와 문의가 수두룩하다.
일부 약국은 정부정책의 빈틈을 공략해 부정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약국 점검에서 불법 판매로 적발된 건 가운데 발기부전치료제 비율이 가장 높았는데 일부 약국은 ‘의약분업 예외지역’임을 표시하는 식으로 발기부전치료제 판매를 암시하는 광고를 내 모객행위를 했다고 지난 5월 드러났다. 경북 지역에서만 9곳이 적발됐다. 발기부전치료제를 포함 오남용우려약품이나 향정신성의약품 등은 의약분업 예외지역에서도 처방전 없이 판매할 수 없다.
의약품 유통을 현행보다 촘촘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면 A 약국뿐만 아니라 약사 마음먹기에 따라 전문의약품이 손쉽게 유통될 수 있는 까닭이다. 허나 지속적으로 관리가 이뤄져야 하는 의약분업 예외지역 약국조차 정부기관의 책임 떠넘기기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각 지역 관할 보건소에 예외지역 약국 감독 책임이 있다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관할 보건소에서 예외지역 선정과 취소를 담당한다. 관리주체도 관할 보건소다”라며 “약사법에 근거해 보건소에서 관리감독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전체 예외지역 약국 수조차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지역 보건소를 관리하는 지자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보건소에 모든 걸 떠넘겼다. 서울시 보건복지과 관계자는 “약국의 조제현황이나 관리는 해당 구청 보건소에서 한다”며 “약품의 산입과 산출을 따져 조제장부 등을 확인하지만 신고 없이는 위법 실태를 포착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틈은 의약품의 판매 시점과 약국의 보험금 청구가능기간의 사이에서 벌어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약값의 일부를 약국에 보전해 준다. 청구가능기간은 3년이다. 그 시간 사이 약국은 처방전 없이 판매한 약의 판매실적을 일단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알리지 않고 쌓아 놨다가 들어오는 처방전으로 틀어 막으며 먼 미래로 폭탄을 넘긴다.
의료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의약품유통정보센터가 약품 유통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고 설명한다. 의약품유통정보센터는 제약사나 의약품 도매상에게 의약품 유통 신고를 받고 병원과 약국에서 청구한 약품과 대조해 의약품 유통현황을 파악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는 “일반의약품이든 비급여 약품이든 유통량 전체를 날마다 확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약국에서는 재고물량도 확보하고 있어야 해서 들어온 약품과 나간 약품을 정밀하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