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아니라고 밝힌 한 남자가 있다. 지난 2015년 김 아무개 씨(77)는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고 고백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가 행세를 한 사람은 수두룩해도 김 씨처럼 자신의 조상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밝힌 경우는 처음이었다. 결국, 지난해 국가보훈처는 김 씨의 증조부 김정필 씨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다.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진실이 아닌 서훈은 명예가 아니라 짐이었다’는 그의 고백이 가진 울림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일요신문’은 10월 17일 김 씨를 직접 만났다.
70대의 평범한 노인 김 아무개 씨는 스스로 자신의 증조부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의 양심고백이 새삼 귀감이 되고 있다. 이미지는 특정 인물과 관련 없음. 그래픽=백소연 디자이너
과거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충남 대덕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정필(1846-1920)은 1907년 한봉수 의병진에 입진해 괴산, 용인, 여주 등에서 수차에 걸친 격전을 치렀으며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펼친 인물이다. 정부는 김정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 씨는 평범하게 살았던 증조부를 무장 항일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킨 인물은 당숙(아버지의 사촌 형제)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당숙이 아버지도 모르게 증조부의 서훈을 신청했다. 얼마 뒤 집안 어른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보훈처에 찾아가니 서훈 신청자인 당숙과 함께 오라고 해 둘이 같이 갔다. 그때부터 당숙에게 지급되던 연금이 종손인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김 씨는 증조부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집안사람 누구에게도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친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인 김 씨의 아버지조차 증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집안에서 당숙의 입김이 워낙 셌다. 당숙에게 ‘증조부가 정말 독립운동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항일 의병장 한봉수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고까지 말하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거면 그런 거라는 식이었다. 만약 증조부의 독립운동이 사실이라면 종손인 아버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텐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던 김 씨는 역사 기록물들을 보며 확신을 갖게 됐다.
“독립운동사를 다룬 책에 동명이인이 나오고 행적도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거짓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 또 기록에는 김정필이라는 인물이 만주에서 객사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증조부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10살 때 집에서 돌아가셨고,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당시 종손이면 집안을 지켜야지 어디 가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안에서는 장사 때문에 만주에서 거주하신 한 분 빼고 딱히 만주지역과는 연이 없다.”
김 씨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진짜 증조부의 모습은 평범함 그 자체였다. “평생을 충남 지역에서 양반집 종손으로 평범하게 사셨다. 집안에서 전해지는 얘기로는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억압당했던 농민들이 악행을 일삼던 양반들을 응징했는데, 증조부께서는 워낙 점잖으신 분이라 오히려 농민들이 가마를 태우고 다니셨다고 하더라”
증조부의 가짜 서훈으로 김 씨의 당숙은 1년여 간, 김 씨의 아버지는 1979년 사망 직전까지 10여 년간 보훈 연금을 받았다. 단 김 씨 본인이 받은 혜택은 없다고 주장했다.
김 아무개 씨는 지난 2015년 자신의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양심고백했다.
김 씨는 일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태원에 대한 가짜 서훈 의혹이 불거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진실을 밝힐 결심을 했다고 고백한다. 2015년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은 평북 출신 독립운동가 김태원 선생의 공적을 대전 출신의 동명이인이 가로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대전 김태원’의 자녀이자 광복회 대전·충남연합지부장을 맡고 있던 김 아무개 씨는 지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김태원과는) 촌수는 멀지만, 일가고 그 자손들과도 연이 있다. (김태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자손들이 여러 사람과 다투는 것을 보며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잘못된 걸 알면서 더는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김 씨는 2015년 증조부에 대한 서훈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고 국가보훈처의 심사 결과 지난해 8월 서훈 취소가 결정됐다. 증조부 본인도 모르는 ‘가짜 서훈’이 결정된 지 수십 년 만에 무거운 짐을 벗게 된 것이다. 이에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는 2015년 12월 이러한 양심 고백의 가치를 인정해 김 씨에게 ‘흥사단 투명상’을 수여했다.
“집으로 증조부의 서훈이 취소됐다는 공문이 왔다. 이 일로 나를 비난하는 집안사람도 있지만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에 떳떳하다. 가짜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난 그런 건 부담스럽다.”
가짜 독립유공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 씨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짜 독립유공자와 후손이 훨씬 많을 거로 추측했다. 실제로 보훈처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재심을 통해 서훈이 취소된 가짜 독립운동가가 39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짜 독립운동가가 1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3분의 1은 부정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내가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루빨리 서훈을 자진 반납하고 역사를 바로잡는데 동참하길 바란다는 말뿐이다.”
박혜리 기자 ssssch3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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