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화 렛츠런 탁구단 감독. 최준필 기자
[일요신문] 1988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이 흘렀지만 서울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현정화는 여전히 한국 탁구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올림픽 금메달 이후 30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 그는 지난 9월 18일 성사된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특별 수행원으로 함께했다. 남북 단일팀으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던 그였기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실업 탁구단 감독이자, 대한탁구협회 부회장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현정화 렛츠런 탁구단 감독을 만났다.
17일 경기도 용인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인터뷰는 진행됐다. 현 감독은 전북에서 열린 전국체전 일정을 마치고 올라온 직후였다. “일찍 탈락해서 올 수 있었다”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아쉬운 표정을 감추진 못했다. 30여 년 선수와 감독으로 수많은 승부의 현장에 있었지만 여전히 패배는 아쉬운 듯 했다.
#올림픽 30주년에 다녀온 북한
선수로, 감독으로 겪은 수많은 승부 중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88서울올림픽이다. 특히 올해는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열리기도 했다. 그는 “특별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나라에서 열린 대회였고 첫 탁구 금메달이었다. 올해 들어 많은 분들이 또 다시 축하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다녀온 것도 그렇고 특히나 올해 좋은 일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특별 수행원 자격으로 다녀온 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현 감독의 눈빛은 더욱 진지해졌다. 선수시절 남북 단일팀을 결성했던 그에게 북한행은 더더욱 특별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맑은 날 백두산 천지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가슴이 뛰는 듯했다. 유홍준 명지대교수, 차범근 전 축구감독, 작곡가 김형석, 마술사 최현우, 가수 알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데 모인 ‘14호차 멤버’들과의 추억도 늘어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순간을 꼽았다. “지난 4월 1차 정상회담 때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만나는 모습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감정을 느꼈고 나도 역시 그랬다. 이번에 북한을 가면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분야 인사들과 함께했던 북한 방문. 사진=현정화 감독 제공
아쉽게도 이번 방북에서 단일팀 복식 파트너였던 리분희와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 감독은 “1993년 국제대회에서 인사를 나눈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국제대회 등에서 북한 측과 접할 기회가 있으면 매번 기대를 하는데 잘 이뤄지지는 않는다”면서도 “앞으로는 어떤 상황이든 한 번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리분희는 현재 북한에서 조선장애인체육협회 서기장으로 현 감독처럼 여전히 체육계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결성된 최초 단일팀의 스토리는 지난 2012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제작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던 현 감독은 “나에겐 좋은 기억이지만 영화 흥행은 아쉬웠다”며 멋쩍게 웃었다. “망한 것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투자가 많이 됐던 것에 비해서는 안됐다”라며 “제작사 관계자분께서는 우스갯소리로 ‘결국 마지막엔 현정화만 남았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고 전했다.
남북 탁구는 올해 또 다시 단일팀을 탄생시켰다.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인 지난 5월 스웨덴서 열린 국제탁구연맹(ITTF)이 주관한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도중 남북 단일팀이 극적으로 결성됐다. 지난 7월 국내에서 열린 ITTF 월드투어 플래티넘 신한은행 코리아오픈에서도 남북이 호흡을 맞췄다. 이에 현 감독은 “탁구는 늘 북한과의 관계에서 앞장서 왔다”며 “이는 대한탁구협회의 능력이다. 처음 단일팀을 했을때 좋은 기억들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북 관계자들이 안면도 있고 서로 협조적이다.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첫 주자였던 내가 우승을 했다. 내가 이런 상황에 나름 역할을 한 것 아닐까”라며 웃었다.
단일팀이 탁구 종목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으로 나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북한 선수들 신상에 대한 통제가 심해 남북 선수들이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고, 팀워크를 만들어나가는데 다소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현 감독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황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음을 설명했다.
“다른 종목의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면이 덜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해외에서 열리는 대회라 평창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북한 선수들이 통제는 받았지만 경기력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다보니 편하게 밖에서 식사도 같이했다. 한식집에서 불고기를 먹고 편안한 분위기로 지냈다.”
# 30년째 ‘탁구 간판’ 현정화의 목표
국내에서 열린 첫 종합 스포츠 이벤트인 1986 서울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을 거치며 현정화 감독은 한국 여자탁구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이후 30년이 흐른 지금도 대중들은 ‘탁구 하면 현정화’를 떠올린다. 그는 “내가 말하기 민망하지만 독보적인 존재랄까”라며 농담으로 말을 시작하면서도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징적 인물이고 탁구를 대표해야 하는 위치다. 항상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담은 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후배들에 대한 걱정스런 마음도 전했다. 그는 “나의 존재가 선수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첫 동메달, 은메달 등도 소중한 일인데 항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현정화’와 비교가 된다”며 “다른 종목에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 지금 시작하는 마음으로 후배들의 결과와 과정을 그 자체로서 응원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지난 9월 ‘일요신문’과 인터뷰했던 유남규 삼성생명 여자탁구단 감독 또한 이 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유남규·현정화는 지난 30년간 항상 함께 붙어다닌 이름이다. 현 감독은 유 감독에 대해 “오랜기간 함께했다. 동향이기도 하고 주니어 대표, 국가대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소개했다. 과거 둘 사이를 부부로 오해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던 사례를 이야기하자 “내 스타일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된다. 내 남편이 얼마나 잘생겼는데”라며 농담을 하면서도 이내 “당연히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둘다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정화 감독. 최준필 기자
40여 년 탁구인으로 살아온 현정화 개인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탁구계 현정화’를 넘어서고 싶다”는 것이었다. 현 감독은 “일하는 분야를 넓혀 체육계 후배들의 환경과 여건 등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그간 해온 선수 지도는 잘할 수 있는 후배들이 얼마든지 많다”면서 “올해 한국 나이로 딱 50살이 됐다. 일할 수 있는 날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 큰 일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앞서 현 감독의 탁구계 선배 이에리사 전 의원은 탁구 국가대표 감독에서 태릉선수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국회까지 입성한 바 있다. 이 같은 사례를 들자 현 감독은 적극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사실 나도 제의를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정계로 진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제안이 왔을 때 우리 엄마가 정치하면 호적에서 뺀다고 했다(웃음). 정말 농담이 아니다. 그때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일은 할 줄 모른다. 정치 하시는 분들이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그저 운동하는 후배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스포츠 분야만큼은 자신이 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