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제구에 위치한 한 내과의원 원장 B 씨의 딸인 A 씨(37)는 초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병원 일을 돕곤 했다. 평일 오후와 주말이면 진료차트 분류·정리, 약 재료 정리, 화장실 청소 등 허드렛일을 도맡은 것. A 씨는 대학 진학, 취업 후에도 병원에 나가 각종 업무를 보조했다. A 씨는 “어머니의 강요와 지시로 병원 업무에 강제적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A 씨의 부친 B 원장이 최근 10년간 A 씨의 명의를 도용, A 씨 앞으로 수백 건에 이르는 허위진료·처방을 일삼았다는 정황이 나왔다는 점이다. 지난 2015년 8월 A 씨의 외할머니가 췌장암 말기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친인척들이 외할머니를 포함한 일부 가족들의 의료기록을 확인했던 것. A 씨의 의료기록도 이때 함께 확인됐다. A 씨의 이모는 “어머니가 췌장암 말기가 되기까지 병원이 알지 못한 것을 수상히 여겨 진료기록부 등을 가족들 것과 함께 확인했다. 그때 조카(A 씨)가 자신의 아빠 병원에서 숱한 허위진료·처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A 씨가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발급받은 ‘건강보험 요양급여내역’에 따르면 A 씨는 2008년 7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아빠 소유 병원에서 299건 진료를 보고 처방전을 297장 받았다. A 씨가 진단 받은 질환은 총 25가지에 이른다. 요통, 위염, 치핵, 근시, 안구건조, 각종 피부염, 어깨유착성관절낭염, 편도주위의 농양, 식도역류병 등 갖가지 질환이 기록된 것. A 씨는 “이중 실제 갖고 있는 질환은 단 하나도 없다”며 “의료 기록상으론 온갖 중증 질환을 가진 환자로 만든 셈”이라고 했다.
A 씨의 이러한 진료·처방기록엔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30대 후반의 여성이 벌써 25가지 질환을 보유, 10년간 병원 한 곳만 줄곧 다녔다는 사실 등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라는 게 의료계의 반응이었다. 심지어 내과의원이 피부·안구·기관지 질환은 물론이거니와 근육·요통 등까지 상시적으로 진료했다. 허위 진료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A 씨는 “요통을 52회, 눈 질환을 24회나 진료·처방 받을 정도면 차라리 내과가 아니라 정형외과나 안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을 것”이라며 “20여 차례나 진료 받은 위염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내시경을 했을 거다. 근데 아빠의 의원은 내시경이 불가하다”고 지적했다. 의료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A 씨 보험내역에 기록된 삼차신경통과 말초혈관질환 등은 주로 고령의 노인들에게서 발병하는 질환이다.
A 씨의 건강보험 요양급여 내역 일부. 빨간색으로 표시한 K 내과의원의 진료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A 씨가 대학원 재학, 근무 등으로 서울에 거주하던 기간인 2008년부터 2009년 8월 사이에도 이 병원의 진료·처방은 상습적으로 이뤄졌다. 해당 기간 A 씨의 신용카드는 모두 서울에서 결제됐다. 하지만 건강보험 요양급여내역에선 A 씨가 부산에 위치한 아빠의 병원에서 무좀이나 위염, 여드름 등을 치료했다고 나왔다.
A 씨는 2016년 건강검진 결과 간수치는 정상, 간질환은 일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빠의 병원은 2013년 4월과 2016년 3월 두 차례 A 씨에게 간질환이 있다고 진단했다. A 씨는 아빠의 병원이 여러 차례 진료·처방한 고도근시, 발백선 등도 전혀 앓은 적 없었다고 했다.
이 병원의 허위진료·처방 정황은 A 씨 외 친인척인 A 씨의 이모, 외할머니의 의료기록에서도 나타났다. A 씨의 이모는 “국내외 여행을 가 있던 기간에 진료·처방이 기록된 경우가 일부 있다”며 “확실한 것만 20건 정도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현재 A 씨와 A 씨 이모 등은 의료법·개인정보보보호법 위반, 사기 혐의 등으로 B 씨를 수사기관에 넘긴 상태다.
이를 두고 강태언 의료소비자연대 사무총장은 “진료과가 40개가 될 정도로 철저히 분업화된 상황에서 내과에서 모든 질병을 치료받은 사실, 수백여 개에 이르는 진료·처방 건수는 비상식적”이라며 “의사가 돈을 타내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A 씨가 선임한 변현숙 법무법인 한올 변호사는 “A 씨는 수십 년간 가정폭력과 학대를 당해왔다. A 씨 부모에게 A 씨의 건강기록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라며 “경찰도 허위 진료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수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A 씨는 가족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2017년 말 집을 나와 따로 지내는 상태다.
이와 관련 원장 B 씨는 “내가 의사다. 내 아이의 상태를 보고 언제든 약을 처방·조제해 줄 수 있다. 내과 의사는 소아과·안과까지 모두 볼 수 있다. 간 상태가 정상이라도 간질환이 의심되면 이를 추정해 병명을 적을 수 있다. 돈하곤 무관하다”며 “부녀지간이기에 아이가 서울에 있을 땐 유선상으로 진료해 약을 준비해주곤 했다. A 씨의 외할머니가 외국에 있을 땐 우리가 약을 조제해서 부쳐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진 기자 reveal@ilyo.co.kr
국민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인지 못해…사례 더 있을 수도 더 큰 문제는 의료 급여비 지급을 관리·감독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이러한 정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이번 사건이 의료 급여비 지급 방식의 허점이라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의료수가는 환자가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본인부담금과 건보공단에서 지원하는 급여비로 구성된다. 병원은 급여항목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를 할 경우 건보공단으로부터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이때 급여비 지급 여부를 심사·결정하는 곳이 심평원이다. 심평원은 병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진료행위 기록을 검토, 그 결과를 건보공단에 제출한다. 건보공단은 이를 토대로 병원에 급여비를 지급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건보공단이나 심평원은 환자에게 “이런 항목의 급여비가 지급됐다”고 일일이 고지하지 않는다. 힐링법률사무소의 홍영균 의료전문 변호사는 “제도적으로 두 기관이 급여 지급 여부를 환자에게 통지하진 않는다. 그래서 만성질환자가 많은 곳이나 급여항목 처리가 많은 곳에서 이런 허위 진료행위가 다수 적발되곤 한다”고 지적했다. 환자가 따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병원의 허위진료·처방 여부는 알 수 없는 셈이다. 심평원은 보건복지부 주관 하에 매달 현지조사를 진행, 병원들의 급여비 허위·부정수급 행태를 파악한다. 하지만 해당 조사는 전수조사가 아닌 표본조사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연대 사무총장은 “해당 조사는 지역병원보다 큰 병원 중심으로 이뤄지며 과거 허위진료 등이 적발된 곳, 장기 입원환자가 많은 곳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