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국회에도 성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국회 내 여성 직원으로서 이들이 겪는 현실은 냉혹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전경. 박은숙 기자
기울어진 대나무숲 운영진은 페이지 홍보를 위해 국회 내에 일정 기간 동안 홍보물을 게시했다. 여성 화장실에 “의원님, 제가 임신해서 그만두라는 건가요?”라는 전단지를 붙였다. 그렇게 알려진 기울어진 대나무숲은 지난 8월 22일을 시작으로 10월 19일인 현재까지 총 19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물론 게시글 수가 많진 않지만 기존의 국회의원‧언론기자‧동료직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여의도 옆 대나무숲’과 비교해 성차별에 대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수를 무시하기 어렵다.
최근 며칠 동안 글이 게시된 빈도수가 더뎌지고 있지만, 운영진은 아직도 여전히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운영진은 기자에게 국회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일터로서 성 평등한 국회와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성 평등한 국회를 만들기 위해 국회 페미니스트는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곳에는 국회 내에서 성별로 인한 불평등을 겪는 여성 직원들의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한 익명의 게시자는 “수많은 회의와 협상, 야근과 야근. 이 전쟁터 같은 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도시락을 시키고 치우고, 끝없이 간식을 사다 채우고, 차 대접을 하고, 전화를 받아 교환해주는 것”이라며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루 종일 후회와 절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이 게시자는 이어 “택배를 찾으러 카트를 가지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다 여성이고, 어느 사무실이든 전화를 걸면 대개 여성이 받고, 회계보고 문서를 제출하러 오는 사람들도 다 여성”이라며 “내가 올라올 수 있는 데는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게시자도 여성 직원들의 업무가 전화응대 또는 단순한 심부름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른 게시자 역시 “우리 방 남자 보좌진들은 전화벨 소리를 죽여놨다. 전화가 와도 그 사람들 전화는 안 울린다. 나한테 오는 전화는 거의 없는 데도 계속 내가 받아서 바꿔주고 있다”며 “우리 방 하급비서가 다 여자다. 인턴 9급, 8급만 여자다. 그래서 여자만 전화를 받는다”고 말했다.
전화 응대가 여성 직원에게 한정되기 이전에, 위의 게시글처럼 전화 응대를 하는 9급, 8급 비서 채용이 여성에게 치우친 것도 현실이다. ‘더팩트’가 국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7월24일 기준, 휴직자 포함)에 따르면 여성 보좌진의 비율은 급수가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여성 보좌진은 9급 비서에서는 64.1%인 과반을 넘는다. 하지만 8급 비서(58.1%), 7급 비서(38.7%), 6급 비서(24.7%)를 거쳐 5급 비서관은 19.3%, 4급 보좌관은 7.2%에 불과했다. 남성 보좌관은 539명인 반면, 여성 보좌관은 42명이었다. 즉, 낮은 급수에만 여성이 쏠리는 현상을 보였다.
국회 내 성희롱을 폭로하는 글도 심심치 않게 발견됐다. 한 국회 소속 직원은 “여자 직원이 근처에 오기만 하면 노골적으로 위아래 훑어보던 남자 비서관이 있었다. 일도 안 하는 주제에 법안 공동발의 도장 받으러 여자 보좌진이 오면 괜히 뭔가를 인쇄했다. 복합기에서 인쇄물이 나오면 굳이 그걸 또 느린 발걸음으로 가지러 나가서는 굳이 또 상체를 숙여서 인쇄물 나온 걸 꺼내면서 옆에 서 있는 여자 분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느릿느릿 훑어본다”며 “그런 속 보이는 짓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매번 그랬다”고 말했다. 또 “스키니진이나 좀 붙는 치마 입은 여자 분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으면 괜히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척 의원실 문 앞에 와서 미적거리며 뒷모습을 구경하곤 했다”며 “소름끼치게 구는 거 여자들은 다 아니까 좀 그만해라 제발”이라고 호소했다.
다른 게시글에서도 “H라인 치마(짧지도, 붙지도 않는 평범한 오피스룩)를 입고 온 날이면 복사하러 프린터 앞에 가지도 못했고, 물 마시러 탕비실에도 못 갔다. 비서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뚫어지게 제 몸만 쳐다봤기 때문”이라며 “보좌진 회의하는 날이면 그 비서관 옆에 앉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쩌다가 옆에 앉는 지옥같은 날이면 회의자료 보는 척 책상 밑에 있는 제 다리를 쳐다보더라”고 말했다. 아울러 “몰래 한 행동이겠지만, 저는 그 역겨운 시선 다 느꼈다. 얼마나 정신없이 뚫어지게 쳐다보던지. 제가 그 역겨운 시선을 따라서 본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못 느낄 정도였다. 더러운 놈”이라고 했다.
임신한 보좌진이 해고될 뻔한 사연도 있었다. 익명의 작성자는 “모 의원실에서 임신한 보좌진에게 나가라고 했다. 인권 관련 정책을 열심히 하던 의원이라서 너무 놀랐다. 그 방도 임신했다고 나가라고 하는데 다른 의원실은 오죽할까”라며 “국회가 일 가정 양립이 완전히 불가능할 정도로 일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임신한 보좌진을 나가라고 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임신한 보좌진은 육아휴직 쓰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이 작성자는 임신한 보좌진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성범죄 관련 일화도 익명으로 올라왔다. 한 게시자는 “상임위원장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때에 우편물을 담당했었다. 어느 날 영등포경찰서에서 소환장이 왔고, 영감(의원)에게 온 건가 싶어서 열어봤는데 일단 모르는 사람이었다. 영등포구 지하철역 공중 여자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하다가 걸린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며 “(그 사람에게) 소환장이 왔으니 찾아가라고 했고, 곧 바로 달려온 그 사람. 머쓱하게 웃으며 다가와서 받아갔는데 너무 깔끔하게 생긴 기혼자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지하철 화장실은 가지 않게 됐고, 집에서도 어딘가에 몰래카메라가 있을 거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같은 여성 보좌진에 대한 불만의 글도 발견됐다. 작성자는 “‘난 생리통 별로 없어서 생리 때 아파서 쉬고 보건휴가 이런 거 사실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우리방 여성 ○○관 님. 평소에도 여성보다 군대 갔다온 남성을 더 불쌍히 여기시는 자애로운 명예남성이시다”라고 비꼬며 “네. 여성의 삶 이해 안 해줘도 되니까 말 걸지 말고 가세요”라고 비판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
국회 내 반응은 싸늘 국회 내에 여성 인권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국회 내 반응은 싸늘했다. 평소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드러내온 한 남성 보좌진은 기울어진 대나무숲에 대한 의견을 묻자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라고 했고, 또 다른 남성 보좌진은 “그 내용은 내가 파악한 게 없어서 잘 모르겠다”면서도 “그건 국회가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각 의원실의 기준과 캐릭터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도 커피는 각자 타고 있지 않느냐. 또, 이와는 반대로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경우는 왜 없겠는가”라며 “그리고 불만이 있으면 여성보좌진 노조를 만드는 방식으로 항의를 해야지 익명으로 움직이는 건 용기가 없는 행동이다. 자신은 지키고 남을 해치려는 것 아닌가”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