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나 초단은 지난 4월 16일 성폭력 미투 폭로글을 올렸다. 이후 6개월이 넘도록 한국기원 집행부는 사과 한마디 없었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나선 윤리위원회는 지지부진한 조사과정에서 2차 가해를 저질렀다는 비난까지 샀다. 결국 완성한 조사보고서조차 왜곡된 부분이 많아 프로기사 223명이 재작성을 요구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10월 바둑계는 더욱 요동쳤다. 원로기사 노영하 9단이 한국기원 홍석현 총재에게 쓴 글이 언론에 공개되자 참다못한 일반 바둑팬들이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한국기원 앞에 모였다. 시위 사태가 이어지자 프로기사들은 임시총회에서 기사회장 불신임과 집행부 해임안 건의를 표결했다. 모두 바둑역사에서 ‘최초’라고 기록해야 할 순간들이다.
10월 8일 벌어진 1차 집회 현장. 일반 바둑팬들이 주도해 한국기원 정문에서 매주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 바둑팬들 거리로 나서다
일반 바둑팬이 한국기원 앞에서 시위한 역사는 없었다. 시위를 주도한 이갑용 씨(73)는 애초 1인 시위를 계획했었다. 인터넷을 통해 시위 참가 인원이 늘어나면서 ‘한국기원 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이하 한바세)’라는 이름으로 한국기원과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등에서 매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현 한국기원 집행부는 미투 사건 해결에 지지부진하는 등 무능함을 보여줬다. 프로기사와 바둑팬이 신속하고 공정한 해결을 재삼 요청했지만 한국기원이 묵살했다”면서 “한국기원이 바둑팬들을 더는 우습게 보지 말고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송필호 물러가라, 유창혁 물러가라’ 등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들고 전단을 뿌리며 확성기로 집행부 퇴진을 외치고 있다.
바둑팬 시위가 한창인 11일 유창혁 사무총장은 한국기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영하 9단이 제기한 의혹들을 해명했다. 윤리위 보고서 재작성에 대해서 “지난 2일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과반 미달로 규정상 재작성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이사회의 의결이 존중되어야 하나 팽팽한 가운데 찬성이 더 많았고 기사들의 재조사 희망이 강한 점, 피해자를 존중한다는 미투 정신에 따라 소정의 절차에 따라 조사서 재작성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보기로 했다”라는 홍석현 총재 의견도 전했다.
그리고 19일 시위를 주도하는 바둑팬들과 직접 만나 1시간가량 면담을 했다. 지금까지 피해자와 바둑팬들에게 공식사과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자 유 총장은 “타이밍을 놓친 건 인정한다. 그러나 11일 기자회견에서 한국기원 입장표명문을 통해 이미 사과했다. 김성룡 제명결정 후에는 김성룡 측이 변호사를 통해 ‘한국기원이 잘못된 징계를 내렸고, 소송을 하겠다’는 입장으로 공문을 계속 보내왔기에 공식사과하면 이에 영향이 있다고 봤다”라고 답했다. 미투 보고서 재작성 문제는 “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객관성이 담보된 외부 인사로 선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인선에 어려움이 있어 시간이 걸린다”라고 설명했다.
유 총장에게 “최근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묻자 “개인적 입장이라면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지만, 지금 그만두면 한국기원 행정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할 것이고, 진행하고 있는 각종 사업이 무산될 것이므로 물러날 수 없다. 인사는 임명권자인 총재 결정에 따르겠다”라고 말했다.
한바세는 8일 1차 시위를 시작으로 11일, 17일, 24일, 29일 시위를 열고, 6차 집회장소는 11월 5일 바둑의 날 행사가 벌어지는 국회의사당 앞이라고 예고했다.
한국기원 송필호 부총재(왼쪽)와 유창혁 사무총장.
# 분노한 여자기사, 기사회장 불신임 추진
노영하 9단 글이 나온 지 4일 후 여자기사회장 박지연은 인터넷 게시판에 손근기 프로기사협회장 불신임안을 올렸다. ‘미투 보고서 재작성에 프로기사 223명이 서명했는데 이 의견을 이사회에서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가 주된 불신임 요청 사유였다.
프로기사협회 정관 제9조 8항은 ‘모든 임원의 불신임안은 투표권 있는 20인 이상의 발의로 과반수 출석과 과반수 찬성으로 가결된다’고 나와 있다. 이후 프로기사 74명이 ‘기사회장 불신임안 총회 안건에 부의’에 동의했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는 모두 350명(남자 286명, 여자 64명)이다.
안팎으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프로기사회가 결단에 나섰다. 18일 열린 대의원회에서 프로기사 대의원들은 10월 29일 오전 11시 한국기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한다고 정하면서 ‘임시총회에서 기사회장 불신임안 투표 진행’과 ‘부총재, 사무총장의 해임건의안 총회 투표 안건 상정’을 의결했다.
대의원회에 참석한 한 프로기사는 일요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해임건의 투표는 용지를 따로 제작해 각각 투표한다. 총회를 통해 집행부 퇴진안이 받아들여지면, 이후 총재에게 정식으로 부총재와 사무총장 해임을 건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사회장 불신임안을 임시총회에 상정한 것도 바둑계에선 사상 초유의 일이다. 손근기 회장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다음 총회에서 기사회장이 선출될 때까지 최명훈 부회장이 기사회를 맡는다. 부총재와 사무총장 해임권한은 인사권자 홍석현 총재에게 있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