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은 포스트시즌에도 야구를 하게 된 다섯 팀과 그렇지 못한 다섯 팀 사이에 극명한 희비가 교차하는 시기다. 이미 하위권 팀들은 단장과 감독, 코칭스태프, 선수단을 전면 재정비하면서 개혁을 시작했다. 반면 두산, SK, 한화, 넥센, KIA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또 한 번 ‘가을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 다섯 팀이 그동안 가을에 펼친 수많은 명장면 가운데 대표적인 순간을 모아봤다.
# 두산
두산은 ‘가을의 팀’이다. 시즌 상대 성적에서 두산보다 앞서거나 어깨를 나란히 했던 팀들도 가을에 만나는 두산은 유독 두려워한다. 수많은 포스트시즌 경험, 그리고 그 안에서 얻은 자양분이 두산 선수들의 몸 안에 입력돼 있기 때문이다.
그 저력이 폭발한 경기가 바로 두산이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최종적으로 거머쥔 2015년 10월 14일 넥센과 준플레이오프 4차전이었다. 넥센에 2승 1패로 앞선 채 4차전을 시작한 두산은 2-9로 뒤지던 경기를 뒤집어 역대 포스트시즌 최다 점수차(7점) 역전승 신기록을 작성했다. 7회부터 9회까지 3이닝 동안 9점을 뽑았고, 무엇보다 5-9로 뒤져 패색이 짙던 9회초에만 무려 6점을 얻어내면서 11-9로 대역전승을 일궜다.
‘크레이지 시리즈’로 기록된 201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당시의 두산 베어스. 일요신문 DB
종전 포스트시즌 최다 점수차 역전승 기록은 6점. 두산이 2001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삼성을 상대로 만들어낸 역전극이었다. 14년 전 자신들이 쓴 가을의 전설을 스스로 고쳐 썼다. 준플레이오프 MVP로 선정된 두산 이현승이 “기적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눈앞에 벌어진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다.
실제로 두산은 그저 여러 차례 포스트시즌을 경험한 것뿐만이 아니라 숱한 명승부를 만들어 냈다. 특히 201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는 지금까지도 ‘크레이지 시리즈’로 기억되는 명장면 열전이었다. 5차전까지 끝장 승부가 이어진 가운데 5경기가 모두 1점 차 승부로 끝났다. 당연히 역대 처음 있는 일. 게다가 5경기 모두 엎치락뒤치락 시소게임을 거듭한 끝에 8회 이후에야 승부가 갈라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된 순간 뒤집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5차전 연장 11회말 삼성 박석민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면서 치열했던 승부에 마침표가 찍혔지만, 팬들은 ‘야구의 모든 것’을 보여줬던 양 팀에 뜨거운 수를 보냈다.
# SK
SK 김광현은 2007년 프로야구에 데뷔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시기는 그해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2007년 10월 26일 열린 두산과 한국시리즈 4차전. 시즌 3승 7패에 평균자책점 3.92를 기록한 고졸 신인 투수가 SK의 4차전 깜짝 선발 투수로 나섰다.
상대 선발 투수는 1차전에서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투구 완봉승(99개)을 거둔 두산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였다. SK 타선은 1회 이호준의 중전 안타로 선취점을 올린 뒤 5회 조동화-김재현의 연속타자 홈런으로 3점을 먼저 냈다. 김광현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위해 그 정도 점수면 충분했다. 앳된 얼굴의 ‘히든 카드’ 김광현은 공 하나마다 힘과 패기를 모두 실어 던졌다.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앞세워 두산 강타선을 틀어막았다. 6회 1사 후 이종욱에게 단 한 개의 안타를 내준 게 전부. 7⅓이닝 9탈삼진 무실점으로 한국시리즈 첫 승리를 따냈다. 그렇게 SK의 에이스가 태동했고, SK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현역 시절 홈런을 치고 있는 장종훈. 사진 제공 = 한화이글스
한화는 창단 이후 지금까지 딱 한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양대 리그 체제였던 1999년이다. 시즌 중반까지는 4강 진출이 위태로웠지만, 추석 연휴를 시작으로 막판 무서운 10연승을 질주하면서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냈다.
두산과 상대한 그해 플레이오프는 한화팬들에게 레전드 장종훈의 마지막 그랜드슬램을 본 시리즈로 기억된다. 장종훈은 연습생 신화의 원조이자 불세출의 홈런왕이었다. 삼성 이승엽이 그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로 군림했다. 다만 1999년은 장종훈이 서서히 선수 생활의 황혼에 접어든 시기였다. 두산도 장종훈을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발 최용호가 1회 선취점을 내주고 무사 만루 위기까지 몰린 뒤에도 장종훈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교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종훈의 클래스는 여전했다. 4구째 슬라이더를 받아쳐 역대 포스트시즌 네 번째이자 플레오프 두 번째인 그랜드슬램을 작렬했다. 장종훈 개인에게는 1989년 한국시리즈 이후 10년 만에 그려낸 포스트시즌 아치였다. 한화는 그렇게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고,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를 만난 장종훈은 마지막 5차전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3으로 맞선 9회 1사 3루서 롯데 문동환과 맞서 결승 희생플라이를 때려내는 데 성공했다. 장종훈은 훗날 “선수 생활을 하면서 그 수많은 경기를 뛰어봤지만, 정말 그렇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렸던 순간은 처음”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 긴장을 이겨낸 보답은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 넥센
넥센이 포스트시즌에서 남긴 최고의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패한 경기에서 만들어졌다. 가장 극적인 상황에 더 이상 극적일 수 없는 홈런 한 방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가을 야구의 정수를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순간을 넥센 4번타자 박병호가 만들어냈다.
2013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5차전 넥센과 두산 경기 9회말 2사 1,2루에서 넥센 박병호가 동점 3점 홈런을 쳐내고 있다. 연합뉴스
# KIA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홈런을 꼽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마지막 승부’인 7차전에서 때려낸 선수는 역대 단 한 명뿐. KIA 나지완이다. 2009년 KIA와 SK는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선 채 운명의 7차전을 맞았다. 초반 분위기는 한국시리즈 3연패에 도전한 SK 쪽에 유리하게 흘렀다. 6회초까지 5-1로 앞서갔다. 그러나 KIA 타선은 늦게 발동이 걸렸다. 나지완이 6회말 2점 홈런으로 추격 시동을 걸었다. 7회말 안치홍의 솔로홈런과 김원섭의 적시타로 2점을 만회해 5-5 동점을 이뤘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KIA와 SK의 경기에서 9회 말 나지완이 솔로 홈런으로 결승점을 내고 홈으로 들어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마침내 찾아온 운명의 9회말. 투수를 모두 소진한 SK는 팔꿈치가 아파 쉬고 있던 채병용을 마운드에 올렸다. 반면 타석에 선 나지완은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터트린 터라 자신감이 충만했다. 볼카운트 2B-2S서 채병용이 던진 5구째 시속 143km 직구가 약간 높게 들어갔다. 완벽한 먹잇감을 찾은 나지완이 무섭게 배트를 돌렸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모두가 홈런임을 직감했다. 역사적인 타구 하나가 잠실구장 하늘을 갈랐다. 나지완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실구장 베이스를 돌았다. KIA 선수들은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KIA는 그렇게 ‘해태’에서 ‘KIA’가 된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빙그레 송진우 볼판정 하나로 ‘퍼펙트’ 놓쳐 5강에 오른 팀들이 포스트시즌에서 보기 좋은 장면만 남긴 것은 아니다. 우선 두산은 2007년 SK와 치른 한국시리즈 3차전이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다. 홈에서 먼저 2승을 하고 인천으로 옮겼지만, 6회 한 이닝 동안 대거 7점을 빼앗기면서 0-9로 패했다. 그 와중에 눈살을 찌푸리게 한 벤치 클리어링도 발생했다. SK가 7-0으로 리드한 6회초 1사 2·3루. 두산 투수 이혜천이 SK 베테랑 타자 김재현에게 초구를 던지려는 순간 3루주자 정근우가 홈으로 달려들었다. 홈스틸 시도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놀란 두산 포수 채상병은 볼을 뒤로 빠뜨렸다. 동시에 2루주자 조동화까지 홈을 밟았다. 당시만 해도 큰 점수 차로 앞서고 있을 때 도루를 하지 않는 것이 한국 야구의 오랜 불문율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그냥 도루도 아닌 홈스틸 시도가 나왔으니, 안 그래도 감정의 골이 깊던 양 팀 선수단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이 득점은 포수의 패스트볼로 기록돼 한국시리즈 최초 홈스틸 기록은 무산됐다. 하지만 화가 난 이혜천이 김재현에게 몸 쪽으로 깊은 위협구를 던지면서 양 쪽 선수단이 모두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오는 난투극으로 번졌다. 두산 김동주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SK 선수들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동료들이 한참을 뜯어 말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사태의 여파로 이혜천은 퇴장당했고, 2승을 안고 있던 남은 시리즈에서 내리 4연패를 해 SK에 우승을 내줬다. 2007년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과 SK 경기에서 SK가 9-0으로 앞선 6회 1사 김재현 타석에서 빈볼 시비로 벤치 클리어링이 나왔다. 연합뉴스 SK는 2009년 KIA와 만난 한국시리즈가 잘 풀리지 않았다. 1차전에서 KIA 이종범의 위장 스퀴즈번트가 나오면서 일찌감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4회에는 KIA 측에서 SK 전력분석팀의 수비 시프트 지시를 놓고 “작전은 더그아웃의 감독과 코치들이 내려야 한다”고 문제를 삼기도 했다. 3차전에선 아예 벤치 클리어링이 나왔다. 4회 2사 후 SK 정근우의 투수 앞 땅볼을 잡은 KIA 투수 서재응이 정근우의 뛰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1루로 천천히 공을 던졌다. 그해 정규시즌에도 한 차례 빈볼시비로 감정이 상했던 두 선수는 말다툼을 하다 감정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고, 양 팀 선수 전원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5차전에서는 포스트시즌 사상 첫 감독 퇴장이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6회 1사 1·2루서 이종범의 2루수 땅볼 때, 2루를 밟고 더블플레이를 노리던 SK 나주환의 오른발을 KIA 1루주자 김상현이 슬라이딩하면서 건드렸다. 송구가 빠졌고, 2루 주자 최희섭이 득점했다. 당시 SK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은 득달같이 달려 나가 수비 방해를 주장했지만, 심판진은 어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김 감독은 선수단을 그라운드에서 철수시키는 강수를 뒀다. 11분간 경기가 지연된 끝에 규정에 따라 퇴장을 당했다. 퇴장 이후에는 모든 입장 표명을 거부한 채 아예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일각에서는 김 감독이 심판들을 의도적으로 흔들기 위해 더 격한 제스처를 취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포스트시즌 역대 5호(한국시리즈 4호)이자 감독으로서는 1호 퇴장.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컵은 결국 KIA가 들어 올렸다. 이글스 에이스로 군림했던 송진우는 팀 이름이 빙그레였던 1991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볼 판정 하나 때문에 사상 첫 퍼펙트게임을 놓치는 아쉬움을 겪었다. 그날 송진우는 8회 2사 후까지 해태 강타선에게 단 한 차례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고 역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김응용 해태 감독이 김종모의 대타로 대전 출신 정회열을 투입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정회열은 볼카운트 1B-2S서 1루수 파울플라이를 쳤다. 충분히 아웃될 수 있는 공. 그런데 이때 포수 유승안과 1루수 강정길이 서로 미루다 타구를 놓쳤다. 계속된 2B-2S서 송진우가 회심의 공 하나를 던졌지만, 이규석 당시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볼. 송진우는 지금도 당시 그 공이 스트라이크존에 꽉 차게 들어갔다고 믿는다. 하지만 판정은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8구째가 다시 볼이 돼 퍼펙트가 깨졌다. 상심한 송진우는 홍현우에게 좌전안타, 장채근에게 2타점 역전 2루타를 각각 맞고 오히려 패전투수가 됐다.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그렇게 날아갔다. 넥센은 201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시리즈 전적 2승 2패로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넥센은 9회 1-0 리드를 지키기 위해 마무리 투수 손승락을 올렸다. 그러나 1사 후 삼성 야마이코 나바로의 평범한 유격수 땅볼 타구를 현역 최고 유격수로 군림하던 강정호가 놓쳐 버렸다. 강정호는 망연자실했고, 넥센 더그아웃은 얼어붙었다. 이 실책은 결국 넥센의 1-2 끝내기 패배로 이어졌다. 3승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뻔했던 넥센은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치고 6차전에서도 대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염경엽 당시 넥센 감독은 패장 인터뷰에서 “꼭 우승하고 싶었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KIA는 2002년 가을 썩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10월에 열린 부산아시안게임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면서 그해 포스트시즌 일정도 예년에 비해 늦춰졌고, 동시에 KIA에도 문제가 생겼다. KIA 김봉근 투수코치가 11월부터 SK로 옮기게 돼 있어서다. 일반적인 시즌이었다면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이어지더라도 11월 초에는 모든 포스트시즌 일정이 종료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계약기간이 10월 31일까지인 코치들이 다른 팀으로 옮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양 팀 관계자들끼리 미리 파악만 하고 있다면 며칠 정도는 충분히 양해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KIA는 김 코치와의 계약 종료 시점에 LG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시리즈까지 가게 된다면 더 큰 혼란이 불 보듯 뻔했다. SK는 KIA에 세 차례나 “포스트시즌이 끝난 뒤에 김 코치를 데려 오겠다”고 했지만, KIA는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 원칙대로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며 김 코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포스트시즌이 한창인 시기에 갑작스럽게 투수코치를 잃은 KIA 마운드는 혼란에 빠졌고, KIA는 끝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