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시장 전경.
탈코르셋이 최근 페미니즘의 정점으로 떠올랐지만 대다수 남성들은 탈코르셋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요신문i’ 기자는 코르셋을 입어 보기로 결심했다. 남성으로서 탈코르셋 현상에 대해 직접 체험하기 위함이다. 10월 23일 오전 10시경, 기자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코르셋’이란 키워드를 입력했다. 오색빛깔을 지닌 여성용 속옷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동료인 웹디자이너는 “올인원 코르셋이 진짜 코르셋이다. 여자들은 올인원 코르셋을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에 입는다”고 말했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직장인 여성들에게 코르셋은 ‘필수템’이라고 했다. ‘올인원 코르셋’으로 검색을 해보니 코르셋 사진이 쏟아졌다. 늘씬한 몸매를 지닌 외국인 모델들이 코르셋을 입고 있었다. 하나같이 허리가 잘록했다.
기자의 키는 183cm, 몸무게는 75kg다. 더구나 남자의 체형이기 때문에 인터넷 쇼핑으로 몸에 맞는 코르셋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10월 23일 오후 4시경 남대문 시장의 속옷매장으로 향했다. 여성용 속옷 매장 방문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여성들의 브래지어, 특히 볼록 나와 있는 부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민망함이다. 남대문 시장 속옷 매장마다 볼록(?)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기자는 가게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였다.
남대문 시장 속옷 매장 모습
갑자기 상인 아주머니가 “엄마, 속옷 사러 왔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코르셋을 입어보고 싶습니다”라고 설명을 늘어 놓았다. 아주머니는 ‘꺄르르’라며 남대문 시장 골목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코르셋은 살에 딱 붙어서 남자들은 아주 답답할 텐데...탈코르셋 이런 것은 처음 들어봐요. 여자들이 잘 보이고 싶어서 입는 것 아닌가 싶어요. 진짜로 허리가 2인치 정도는 훅 들어가요. 여자 사이즈 105까지 나오는데 총각은 뭘 입어야 하나. 100 사이즈로 줄까요? 아니면 정말 꽉 조이는 걸로 줄까요.”
거침없이 전신을 조이는 올인원 코르셋을 달라고 했다. 색깔은 베이지, 보라, 검정이 있었는데 보라색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상인 아주머니는 보통 여성들은 보라색을 입지 않고 베이지색이나 검정색을 입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검정빛갈의 올인원 코르셋을 택했다. 코르셋의 허리춤을 손으로 만져봤다. 고무줄보다도 질긴 탄력이 느껴졌다. 일반 타이즈하고는 감촉이 전혀 달랐다. “허벅지부터 막히면 어떡할까”라는 걱정도 들었지만 용기를 내서 코르셋을 구입했다. 가격은 3만 원, 검정 봉지에 코르셋을 담았다. 봉지를 들고 유유히 남대문 시장을 빠져나왔다.
밤 11시 30분, 집에 도착했다. 출근길에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서랍장 안쪽에 코르셋을 넣어 놓았다. 이튿날 오전 6시 50분, 알람 소리에 맞춰 잠에서 깨어냈다. 적어도 7시 40분에 오는 버스를 타야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화장실로 가서 이를 닦고 머리를 감았다.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양말과 팬티를 찾으러 침대 옆 서랍장으로 향했다. 가지런히 개어있는 여러 장의 팬티 가운데 마음에 드는 팬티와 러닝을 골랐다. 러닝을 입으려는 순간, 기억이 났다. 코르셋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랍장 구석에 보관해놓은 올인원 코르셋을 부랴부랴 꺼냈다. 출근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코르셋은 다리 밑에서부터 입어야 했다. 일단 침대에 앉아 몸을 새우등 자세로 구부린 채로 두 발을 코르셋 속으로 집어넣었다. 두 손으로 코르셋 양쪽을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하지만 무릎에 걸리면서 첫 번째 난관에 부딪쳤다.
다시 한 번 온힘을 다해 손으로 코르셋을 올렸다. 간신히 골반까지 코르셋이 올라왔다. 끝이 아니었다. 배 위쪽으로 코르셋 천을 조금씩 잡아당겼다. 마치 코르셋과 씨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타구니 안쪽 살이 쓸리면서 통증도 느껴졌다. 코르셋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미 시간은 5분이 지나 있었다. 더욱 힘을 내서 코르셋을 가슴 쪽으로 힘껏 올렸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코르셋이 몸통을 거의 덮었지만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코르셋 끈을 위로 올리고 한쪽 팔을 우겨넣었다. 다른 쪽 팔도 안쪽으로 최대한 구부려 집어넣었다. 순간적으로 끈이 양쪽 어깨를 짓눌렀다.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손으로 엉덩이 뒤쪽에 있는 코르셋 천을 등 쪽으로 잡아 당겼다. 코르셋 위에 셔츠를 입었다. 가슴이 살짝 나와 있어서 민망했다. 코트를 입은 채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각이었다.
걸을 때마다 코르셋 끈이 어깨를 자꾸 눌렀다. 숨을 한 번에 몰아쉬는 일이 많았다. 코르셋 천이 허리를 완전히 감싸고 있어서 불편했다. 다리를 움직이면 사타구니 안쪽 피부와 코르셋 천의 경계에서 살이 쓸렸다. 온몸에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지하철에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연속이었다. 오전 9시 10분,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녹초상태. 배도 아프고 소변도 마려웠다.
화장실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소변기 앞에 섰다. ‘아차’ 싶었다. 코르셋을 착용한 채로 소변을 볼 수 없었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서 양변기 뚜껑을 덮고 앉았다. 셔츠를 벗고 일어서서 코르셋의 어깨끈을 하나씩 벗었다.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힘을 주어도 골반에 걸린 코르셋은 아래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코르셋 천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잡고 아래쪽으로 밀고 또 밀었다. 마치 누에가 허물을 벗는 모습이었다. 코르셋을 완전히 벗었을 때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양변기 뚜껑을 다시 열고 앉아서 소변을 처리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다시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코르셋의 압박감이 또 밀려왔다. 컴퓨터 작업을 하려고 팔을 책상에 올려놓을 때마다 어깨끈이 겨드랑이살을 건드리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10분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점심시간 무렵, 허리 통증이 시작됐다. 어깨와 가슴 그리고 허리가 돌아가면서 아팠다. 오후 4시경 기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회의실로 달려가 코르셋을 벗어버렸다. “으아...” 탄성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온몸의 피부 곳곳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다.
“요즘 애들은 올인원 코르셋 안 입어, 차라리 굶고 말지, 아줌마들이나 이런 코르셋 입는데 왜 입었어?” 코르셋 체험기를 마친 뒤 동료 기자가 한 마디를 붙였다. 기자의 몸에 있는 자국을 보고 다른 동료 기자는 “작은 사이즈 입었을 때 나타나는 건데...고생했네”라고 말했다. ‘착’ 코르셋 체험기는 결국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탈’ 코르셋 이후, 기자는 편안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탈코르셋 현상 자체를 이해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여성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외모를 신경써야 하는 책임에는 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