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22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특별시 국정감사에서 서울교통공사 채용비리 관련 답변을 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여권 플랜B의 핵심은 ‘빅딜 카드’다. 연말정국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국조 카드를 예산·입법의 빅딜 카드로 쓰는 것이다. 전형적인 여의도 문법이다. 박근혜 정부 공무원연금 개혁안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1년차 때도 일자리 추가경정예산과 인사 등이 빅딜 카드로 부상했다. 올해 상반기 뜨거운 감자였던 ‘드루킹 특별검사법안과 추가경정예산안 동시 처리’ 역시 빅딜 카드의 산물이다. 여권 플랜B가 연말정국의 한가운데를 관통할 가능성이 큰 이유다.
현재 야 3당뿐 아니라 정의당까지 고용세습 국조 대열에 동참하면서 사실상 여권의 선택지는 좁아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연일 방패 막을 치면서도 논의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았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 등 야 3당이 공공기관의 고용세습 국조를 공동으로 제출한 10월 22일 “국감 결과를 보고 필요하면 다시 논의할 것”이라며 “정말 필요하다면 우리도 응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명분과 현실을 모두 고려한 조치다. 서울교통공사 친인척 채용 논란이 불거진 지 일주일 만에 강원랜드와 한국가스공사, 한국도로공사, 서울도시주택(SH)공사 등 10여 곳에서 친인척 채용 의혹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야권 한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8월까지 공공기관 853곳 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인원만 8만 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며 “전수조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지금껏 드러난 공공기관 친인척 채용 논란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 경우 ‘국정 발목잡기’ 프레임을 앞세운 민주당의 시간벌기 전략은 사실상 무력화된다.
현실론도 강하게 작용했다. 한국당(112석)·바른미래당(30석)·민평당(14석)의 의석수는 156석이다. 국회법상 국조의 의결요건은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 요구·본회의 과반 의결’이다. 정의당을 뺀 야 3당만으로도 본회의 가결 정족수가 충족되는 셈이다. 10월 말 국정감사가 끝나면, 예산정국이 도래한다. 이는 문재인 정부 2년차의 성패를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여권이 버티기로 일관할 경우 예산정국을 돌파할 동력을 상실한다. 경우에 따라 연말정국의 주도권을 야권에 통째로 뺏길 수도 있다.
야당 단일대오에 금이 간 것도 여권이 플랜B로 선회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야 4당의 입장은 미묘하게 엇갈린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문재인 정부를 사정권에 넣었다. 평화당은 ‘공공기관 고용세습 문제는 현 정부만이 아닌 구조적 문제’라며 결을 달리했다. 과녁을 문재인 정권에 국한하지 않은 것이다. 정의당은 아예 전 정권 인사가 포함된 강원랜드는 물론,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국조에 포함하자고 주장했다. 정의당은 오 전 시장을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 외주화의 최종 결정권자로 지목했다. 강원랜드 채용비리 사건에는 한국당 권성동·염동열 의원 등 전·현직 한국당 의원 7명이 연루됐다.
한국당은 “전형적인 물타기”라며 즉각 반발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정의당이 별도로 조건을 내걸면서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그러려면 민주당과 다시 상의하고 오라”고 초반부터 파열음을 냈다. 평소 정의당을 민주당 2중대로 보는 시각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다만 “강원랜드 국조를 수용 못 할 것도 없다”며 완전한 거부에는 선을 그었다. 반면,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국조 요구서에 ‘각 공공기관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한 사안’ 전반으로 명시된 만큼, 정의당의 주장대로 강원랜드 등의 사례도 충분히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보수 양당부터 엇박자를 냈다.
야권 전략의 ‘디테일 부족’도 여권 플랜B 등장을 부채질하고 있다. 애초 한국당 전략은 ‘1타 3피’였다.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커넥션 의혹을 고리로 문 대통령까지 치는 전략이다. 한국당이 애초 이를 ‘문재인·박원순·민주노총’의 권력형 비리로 규정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권 한 관계자는 “한국당이 이를 귀족노조나 권력형 비리로 규정하면서 판이 덜 커진 측면이 있다”며 “처음부터 이 문제를 2030세대의 취업 등 공정 문제와 연결했다면, 이번 국감의 최대 이슈인 유치원 비리의 파급력과 맞먹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의 전략 미스를 꼬집은 것이다.
여권 내부에서 국조를 수용해도 불리할 게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한국당은 고용세습 국조 논란이 불거진 지 보름 남짓한 사이 프레임 전환에 나섰다. 권력형 채용 비리 차원을 넘어 약탈을 일삼는 일자리 적폐 문제로 확대했다. 공정성에 민감한 2030세대는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당 인사들이 ‘취업준비생(취준생)의 눈물’ 등을 본격적으로 말한 것도 이때부터다. 초반 전략 미스로 ‘이슈의 집중도’를 스스로 떨어트렸다. 한국당의 전략 부재가 드러나자 역공도 나왔다. 김태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되레 “공공부문의 정규직 전환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추진한 일”이라며 “한국당이 추진한 정규직 전환은 정의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정규직 전환은 고용세습이라는 건 저열한 정치공세”라고 힐난했다.
고용세습 의혹의 기저에 노조 간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민주당에는 나쁘지 않다. 고용세습 주범 논란에서 한발 비켜설 수 있어서다. 정치권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고용세습 논란에는 노총의 양대산맥인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한 축을 차지한다. 보수 야당이 연일 한국노총보다는 민주노총을 정조준하면서 ‘신적폐’ 프레임을 덧씌우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한국노총도 고용세습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아 노동계 전체가 도매금으로 심판대에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금호타이어 등 민주노총 9곳과 현대종합금속 등 한국노총 3곳, 미가입(두산모트롤) 1곳 등 총 13곳의 단체협약에 고용세습 조항이 들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른미래당 한 당직자는 “이번 겨울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고용세습 국조 정국”이라며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파상공세를 예고했다.
민주당의 고민은 깊다. 시간 벌기에 들어간 민주당의 방패막이 어느 정도 견고할지 알 수 없다. 예산정국이 기다리고 있어 마냥 ‘강 대 강’ 대치에 드라이브를 걸 수도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대치정국에 따른 입법 마비에 부담을 더 느끼는 쪽은 야당보다는 여당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인 박 시장이 이 과정에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이미 박 시장은 ‘여의도 통째 개발’ 발언으로 서울 부동산값 폭등으로 주범으로 낙인찍힌 상태다. 당내 차기 대권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도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박 시장마저 흔들린다면, 여권의 ‘포스트 문재인’ 찾기에는 적색 경고등이 켜질 수밖에 없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권은 야당의 고용세습 국조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게’가 아니었느냐”라며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국조를 거부한다면, 의혹이 커지면서 여권이 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