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채팅(chatting) 사이트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런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자정이 넘지는 않았어도 꽤 늦은 시간이었다.
딱히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 눈은 구석에 띄워진 친구목록 창(窓)부터 살피고 있었다. 일전에 등록시켰던 그녀의 아이디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지은 방 제목은 여전히 ‘서른셋’이었다.
-‘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나> 안녕하세요.
그녀>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나> 제가 있는 걸 어떻게 아셨죠?
그녀> 후후, 친구 등록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엊그저께.
엊그제, 내가 대화방에 들어선 것은 사흘 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없던 동안에도 매일 채팅을 했고, 단 한 번 마주친 내 아이디도 그때껏 외우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 며칠 안 보이시는 것 같던데요.
나> 네. 일을 좀 하느라고요. 계속 들어오셨었나 보군요.
그녀> 그냥 낮에 가끔씩 들렀었어요.
나> 낮에요?
그녀> 회사에서요. 아직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종종 한가할 때가 있거든요.
나> 그렇지만 지금은 꽤 늦은 밤인데….
그녀> 내일은 일요일이잖아요.
나 > 그렇군요. 까먹고 있었어요.
회사를 다니지 않는 나로서는 날짜나 요일 따위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살짝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emoticon)이 등장했다. 두 번째 대화임에도 나는 그녀의 그런 표현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 친구들은 많이 만드셨나요?
그녀> 아니요. 별로.
나> 왜요?
그녀> 여기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요.
나> 그런 사람들?
그녀> 추근대는 남자들 말이에요. 지난 번에 얘기했던.
나> 아….
그녀> 처음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꼭 번개를 하자거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더군요. 싫다고 하면 욕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제 친구목록에는 ‘나’님뿐이에요.
글쎄다. 온라인상이라고는 해도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이런 대화방에서 단순히 채팅만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를 만날 목적도 아니라면 그녀가 이곳에 자주 들락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정말 대화 상대를 찾는 게 전부일까.
그녀> 희한해요. 제가 유부녀라고 밝혔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남자들이 더 적극적이 되는 것 같았어요. 왜들 그러는 걸까요?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해야 했다.
나> 가끔 유부녀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녀> 이런 곳을 통해서 남자를 만나려고요?
나> 네.
그녀> 그렇지만 그건….
나> 맞아요. 그리 좋게 보일 일은 아니죠. 나름대로 이해는 되지만.
그녀> 그런 심리를 이해하세요? 여자들의 심리를?
나> 아뇨. 그것보다는 그렇게 된 상황을 이해한다는 쪽이겠죠.
길게 이어지는 모니터의 글자들 속에서 나는 그녀의 호기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요새 세상에서는 갈수록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워지니까요. 통신수단이 발달해서 서로 얼굴을 보는 일조차 드물어지구…. 편지가 없어지는 것처럼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도리어 누군가와 접촉하기는 쉬워졌죠. 이렇게 컴퓨터만 켜고 있어도 하루에 수백 명을 알 수 있잖아요.
그녀> 현대인의 고독이네요.
나> 그런 셈이죠. 그리고 점점 더 많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 전화는 얼굴을 가려 주고, 이런 채팅은 아예 목소리까지 가려 주죠. 그렇게 숨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도 보장해 주는 게 아닐까요?
그녀> 이해가 돼요.
나>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하는 걸거예요. 만약 얼굴을 보여 줘야 한다거나, 하다 못해 목소리라도 들려 줘야 한다면 함부로 못할 일들을 말이죠. 게다가 특히 ‘그녀’님 같은 유부녀는….
그 대목에서 나는 자판 두드리기를 멈췄다. 조금은 엇나간 이야기일 성싶은 탓이었다.
그녀> 저 같은 유부녀가 어때서요?
그녀가 다그쳐 물었다. 나는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놀렸다.
나> 뭐랄까, 남자들의 심리 이야기에요.
그녀> 남자들의 심리요?
나> 음…. 다른 남자의 아내라서 그만큼 더 탐욕이 생긴다는 거겠죠. 여자가 물건은 아니지만, 남의 것을 몰래 훔친다는 쾌감도 있을 테고요.
그녀의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 일상적인 단어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돌아온 것은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이었다.
그녀> 알 것 같아요. 남의 것을 훔친다는 의미.
이번에는 나도 대답 대신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녀 역시 유부녀인지라 쉽게 이해하는 듯했다.
그녀> 근데 ‘나’님, 제가 뭐 하나 물어 봐도 될까요?
나> 뭔데요?
그녀> 혹시 결혼하셨나요?
나> 아니요. 아직 안했습니다.
그녀> 후후후.
나> 후후후?
그녀> 미안해요. 남자든 여자든 너무 잘 아시길래…. 그래서 결혼하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머쓱히 미소를 지었다.
나> 글쎄요. 직업 탓인 것 같군요.
그녀> 직업이요? 저번에도 농담처럼 말씀하셨는데, 무슨 일을 하세요?
그녀의 호기심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도 내 직업을 말하지 않았다.
▲ 그림 최경태 | ||
“샤워 좀 해도 되죠?”
동거를 시작한 지 거의 석 달째임에도 그녀는 집 안에서 뭔가를 할 때마다 항상 나의 허락을 받듯이 그렇게 묻고는 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안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려 왔다. 십 분쯤 지나 아예 상체까지 벌거벗은 효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오빠 방에서 잘래요.”
그녀가 내 방에서 자겠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암시였다. 함께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십여 평짜리 오피스텔을 엄연히 나눠 쓰고 있었다. 거실 겸 안방은 내 작업실인 동시에 침실이었고, 좀 더 작은 건넌방이 효미가 지내는 공간이었다. 그 경계는 보통 두 가지 경우에 한해 무너졌다. 첫 번째는 같이 밥을 먹을 때였고, 두 번째는 오늘 밤 같은 경우였다.
나는 유부녀란 단어를 떠올리며 효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의 것을 훔치는 쾌감-하지만 법적으로 처녀인 효미에게 그런 쾌감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내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그녀는 나의 소유도 남의 소유도 아닌 모호한 존재였다.
침대에 오른 효미는 팬티만 걸친 채 무릎을 모으고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불빛이 그녀의 허벅지 아래에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내 입술이 효미의 자그마한 귓불에 닿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우리는 긴 키스를 교환했다.
효미는 입맞춤이 서툴렀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크게 흥분시키는 것은 바로 그런 키스였다. 서로의 혀가 서로를 어색하게 더듬었다. 효미는 가녀린 숨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침대보 위에 몸을 눕혔다.
“오빠….”
효미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꽃잎은 평소보다 조금 더 젖어 있었다. 아마도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효미는 은정이 만큼이나 예쁜 여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은정이를 닮았기에 내가 호감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십여 년 전의 은정이처럼 그녀 또한 나에게 분명 일종의 사치였다.
우리가 같이 살게 것은 대화방의 ‘그녀’가 궁금해하던 나의 직업과도 연관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어느 바(bar)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일하는 바텐더 겸 종업원이었다.
직업상 나는 거의 하루종일을 혼자 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원고가 막히면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했다. 내가 그런 장소로 택한 곳은 대부분 술집이었지만, 어차피 누군가와 어울리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주로 조용한 바를 단골로 삼았다.
그것은 어느 일요일이었다. 오후부터 내내 원고에 매달리고 있던 나는 밤 9시가 넘어서야 끝내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날도 정말 지독히 머리가 돌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번화가로 향했다. 한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단골로 들리던 술집의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오며가며 눈에 익혀 두었을 뿐인 그 바에 무심코 발을 들여놓았다.
“어서 오세요.”
내가 자리에 앉자 메이드(maid) 타입의 까만 유니폼을 입은 앳된 아가씨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가 바로 효미였다.
그곳은 상당히 특이했다. 몇 개의 테이블만 가운데에 놓은 채 나머지는 카운터를 따라 바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묘한 것은, 벽에 달린 스피커에서 Depeche Mode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음악은 나에게 당장 은정이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