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이 R&D 법인을 분리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석 달 전인 지난 7월 20일이다. 산업은행은 한국GM이 지난 10월 4일 이사회를 개최해 법인 신설 안건을 통과시키고 19일 주주총회를 열어 R&D 법인 분할을 의결할 때까지 철저히 배제됐다. 이른바 ‘산은 패싱’이었다. 주주총회 당시 산업은행은 주주총회장에 참석조차 못했다. 한국GM 노동조합이 ‘GM의 법인 분리는 한국 시장 철수를 염두에 둔 글로벌 GM의 술수’라고 규정, 산업은행의 주주총회장 참석을 막은 게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GM은 산업은행의 불참 고려 없이 법인 신설을 추진했다.
문제는 산업은행이 사실상 한국GM에 유일하게 신규 투자를 진행하고도 글로벌 GM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데 있다. 산업은행은 “법정관리를 신청할 것”이라는 글로벌 GM 협박에 못 이겨 지난 5월 기본계약서를 체결, 7억 5000만 달러(약 8100억 원) 시설자금 신규 투자(우선주 출자)를 약속했다. 같은 계약서에서 글로벌 GM은 차입금을 출자로 전환하고, 구조조정 비용 8억 달러(약 8630억 원)만 유상증자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기본계약서에서 글로벌 GM이 28억 달러 시설 투자를 약속한 만큼 유리한 장사였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회전한도대출’인 것으로 드러났다.
회전한도대출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대출로 필요한 만큼 빼서 쓰고, 쓴 만큼 이자를 지불하는 대출이다. 결국 산업은행만 신규 설비 투자자금을 대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GM이 진행한 차입금 출자 전환과 구조조정 비용은 대주주로서 마땅히 책임져야 할 비용이다. 실제로 한국GM이 글로벌 GM에 진 차입금 자체가 대부분 2002년 글로벌 GM이 대우차를 인수할 당시 산업은행에 진 채무와 유럽 법인 철수 비용을 떠안은 것이다. 퇴직 위로금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가 책임지는 것인 만큼 사용자인 한국GM의 지배사 글로벌 GM이 책임져야 한다.
글로벌 GM이 지난 5월 31일 폐쇄 결정한 한국GM 군산공장. 연합뉴스
산업은행의 나홀로 투자 비판이 일자 산업은행은 뒤늦게 글로벌 GM의 일방통행에 반발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부랴부랴 법인 분할 자체에 대한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 방침을 내놨다. 그러나 모호하다. 산업은행은 글로벌 GM이 지난 4월 13일 “이해당사자들의 합의가 없으면 법정관리를 신청할 것”이라고 협박한 데 대해 “GM이 (산업은행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 시 적절한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도 노사 협상 자리에 나와 GM의 입장을 대변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국GM이 R&D 법인 분리를 강행할 수 있는 이유다.
당시 산업은행이 글로벌 GM에 맞서 밝힌 법적 대응 방편은 법정관리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다. 이번 법인 분리에 대한 산업은행의 대응 방편도 한국GM의 R&D 법인 분할 자체에 대해 법원 가처분 신청을 내는 것이다. 글로벌 GM에는 두렵지 않은 대응이다. 더욱이 지난 10월 17일 산업은행은 한국GM의 R&D 법인 분리 계획에 대해 주주총회 개최 금지를 요구하며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경영진의 판단은 존중받을 측면이 있다’며 기각했다.
더 큰 문제는 한국GM의 R&D 법인 분할과 관련해 산업은행이 비토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앞서 정부와 산업은행은 한국GM과 지난 5월 경영정상화 방안에 합의하면서 산업은행의 비토권을 받아냈다. 당시 합의사항을 보면 17가지 특별결의사항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85% 이상 찬성해야 한다고 규정, 지분 17%를 보유한 산업은행이 비토권을 갖게 했다. 총자산의 20% 이상을 매각하거나 양도, 취득 시에 대해서도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특별결의사항 중 하나다. 그렇지만 법인분할은 17가지 특별결의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태도는 글로벌 GM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 10월 22일 국정감사에서 이 회장은 “법인 분할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법인 분할이) 회사의 이익이 될 수도 있다”면서 산업은행이 투입하기로 한 8100억 원 가운데 아직 투입하지 않은 자금 절반도 GM의 철수를 막기 위해 집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특히 이 회장은 한국GM이 사업계획을 제출한다면 협의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뒀다. 글로벌 GM이 추진하는 한국GM 법인 분리를 절차상 문제로 한정해 향후 법적 대응 실패를 피하려는 의도다.
전문가들은 산업은행이 일자리를 강조하고 나선 정부 등쌀에 밀려 글로벌 GM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산업은행의 무기력함 이면에는 수천억 원을 내줘도 GM과 관련한 일자리 15만여 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정부 요구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은행 한 관계자는 “당초 산업은행은 한국GM 경영정상화 금융 지원을 압박한 글로벌 GM에 ‘대출에는 대출로, 출자에는 출자로’라는 협상 방침을 정했지만, 글로벌 GM이 진짜 철수를 결정할 시 불거질 비판과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GM은 “투자 없인 공장 폐쇄”, “선 지원 후 신차 배정”, “정부 지원 미비 시 정리해고”라는 협상 전략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글로벌 GM은 2013년 호주에서 철수설이 불거졌을 당시 ‘우리는 여기 남을 것이다(We are here to stay)’라는 광고까지 냈지만, 호주 정부가 추가 지원금을 거절하자 같은 해 말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국내서도 같았다. 글로벌 GM은 ‘투자 없이는 한국에 남을 수 없다’며 지방선거를 4개월여 앞두고 투자를 요구했다. 정부는 산업은행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글로벌 GM은 지난 5월 자금 지원 약속의 일환으로 진행한 정부 양해각서(MOU)까지 위반하며 한국GM의 R&D 법인 신설을 강행하고 있다. 앞서 정부와 GM은 한국GM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끝내고 MOU를 체결했다. MOU 제1조 제2호에는 자동차 핵심부품과 관련한 한국GM R&D 역량을 확대하는 데 있어 공동작업반을 구성해 협의를 지속하기로 돼 있지만, 글로벌 GM은 아직 공동작업반 구성은커녕 한국GM 내 R&D 법인 신설에 대해 어떤 협의조차 진행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GM과 맺은 양해각서에서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추진키로 했지만, 한국GM의 R&D 법인 분리 강행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실
이에 산업은행은 실질적인 투자를 진행하고도 법인 분리에 따른 세부사항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산업은행은 R&D 법인 분리 후 자금 지원으로 보유하게 된 비토권·이사추천권·주주감사권과 같은 경영 견제 기능이 신설 법인에서 유지 가능한지 여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요신문’이 단독 확보한 국정감사 전 산업은행의 비공식 답변서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비토권·이사추천권·주주감사권이 신설 법인으로 승계되는지에 대해 “협의가 필요한 사항인 것 같다”면서 “GM이 그런 지점에 대해 별도로 언급한 것이 없다”고 밝혔다.
글로벌 GM은 법인 설립이 한국GM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 법인 설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한국GM은 국내 판매용 경차·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만 해왔지만, R&D 법인 신설 이후 글로벌 GM이 시장에 내놓는 콤팩트 SUV(이쿼녹스의 후속 모델) 개발까지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 한국GM 관계자는 “R&D 신설 법인은 한국GM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편인 만큼 홀로 결정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안으로서 산업은행과 긴밀한 협의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배동주 기자 ju@ilyo.co.kr
한국GM 법인분리 뒤바뀐 시선…야당은 ‘반대’ 여당은 ‘뒷짐’ 한국GM 사태를 바라보는 정치권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GM 노사 교섭 협상장에 배석해 글로벌 GM이 내건 ‘이해당사자 합의’를 중재했던 여당은 빠지고, 대신 야당이 R&D 법인 분리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부가 산업은행을 통해 한국GM에 신규 자금 투입을 합의하고 글로벌 GM이 한국에 생산시설을 향후 10년 이상 유지키로 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특히 인천 부평구(갑)를 지역구로 하는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이 한국GM의 R&D 법인 신설 강행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 의원과 같이 인천을 지역구로 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군산공장 폐쇄가 불거진 지난 2월 “한국GM 부실화 원인은 글로벌 GM의 돈만 벌려는 구조 때문”이라며 날선 비판에 나섰지만, R&D 법인 분리에 대해선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4월 국회접견실에서 댄 암만 GM 총괄사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는 지난 2월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후 두 달여간 정부와 여당, 산업은행이 이해할 수 없는 졸속협상으로 결국 국민 혈세만 낭비한 꼴이 됐다는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서둘러 GM과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다 생산시설 철수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으로 해석되는 R&D 법인 분리를 듣고도 묵인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 지난 4월 말 글로벌 GM은 산업은행과 자금 지원 막바지 협상에서 ‘한국GM 법인 신설’ 안건 논의를 제의했으나 노조 반발과 시간 촉박 등을 이유로 묵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안건은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와 기획재정부가 모두 참석한 정부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에도 올랐다. 산업부는 현재 법인 신설 건은 산업은행과 GM 간 문제라 판단하고 관망하고 있다. 여당 내 한 관계자는 “노조마저 홍영표 의원이 있는 여당을 찾지 않고 야당을 찾고 있다”면서 “기자회견은 추혜선 정의당 의원이 주로 맡고, 산업은행 자료나 향후 법인 분리 추진에 대한 정부 부처 입장 등은 자유한국당이 적극적인 게 사실이고, 여당은 오히려 노조가 강성으로 나가 GM이 철수할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배] |
노조 “철수·노조세력 약화 수순” 부글 한국GM이 판매량 하락에 아랑곳없이 ‘철수 혼돈’을 재점화했다. 한국GM은 지난 5월 노조와 군산공장 폐쇄 및 3000여 명 구조조정에 합의하며 경영정상화에 돌입, 지난 6월 곧장 판매량 회복을 일궈냈지만 지난 7월 한 달 만에 지난해 같은 달 대비 18% 판매 감소를 겪었다. 한국GM이 지난 7월 R&D 법인 분리를 선언하면서 봉합됐던 노사갈등이 다시 불거진 탓이다. 한국GM 노조는 “R&D 법인 분리는 철수 및 노조 세력 약화를 위한 수순”이라 비판하고 나섰고, 소비자는 한국GM을 외면했다. 일각에선 한국GM이 완성차 업체 매출 기반인 판매량 대신 노조 세력 약화를 위한 법인 분리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그동안 글로벌 GM은 한국GM의 경쟁력 약화 요인으로 이른바 강성 노조를 지목해 왔다. 2016년 역대 최대 판매 기록을 이끈 제임스 김 전 한국GM 사장 경질도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에서 노조에 끌려다닌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GM 고위 관계자는 “제임스 김 사장은 노조 목소리를 막기보단 판매량에 집중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GM은 R&D 법인 분리가 한국GM 경쟁력 강화에 유리하다고 설명하지만, 노조는 R&D 법인 분리는 현재 1만 300여 명인 노조 조합원을 연구·개발과 생산·정비로 분리해 세력을 약화하려는 방책이라고 평가한다. 우병국 한국GM 노조 동서울 분회장은 “법인 분리는 향후 한국GM의 독자생존을 막을 뿐 아니라 한국GM이 개발한 차량을 한국GM이 생산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생산 비용을 낮추려는 꼼수일 뿐”이라며 “글로벌 GM이 한국GM 적자 원인을 애꿎은 노조로 떠넘기고 있다”고 했다. 실제 한국GM 적자 누적은 반드시 노조의 고임금 탓이라고 볼 수 없다. 한국GM 급여 총액은 지난 5년간 매년 약 3.5% 올랐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협약임금 인상률’의 연 평균치 3.28%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특히 2013년 이후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한국GM은 생산과 판매서 영업손실 1조 262억 원을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3조 4974억 원 당기순손실을 냈다. 글로벌 GM이 깊게 관여하는 한국GM 영업외부문에서 2조 40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내고 있는 셈이다. 올해 판매량은 지난 6월 반짝 반등 후 계속 내리막을 걷고 있다. 한국GM은 법인 분리 발표 후 노사 교섭도 전혀 진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한국GM은 김앤장과 모든 법적 절차 협의를 진행하는 동시에 변호사 출신인 최종 한국GM 부사장을 법무팀 상무에서 대외협력실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노무·인사까지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GM이 법적 하자가 발생하지 않는 방식만 채택, 대화하지 않고 무시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는 불만이 노조와 산업은행 등에서 불거지는 이유다. 한국GM 관계자는 “법인 분리에 따른 노조 세력 약화는 노조의 주장이지 본령은 경쟁력 강화에 있다”면서 “최종 부사장이 노무·인사를 담당하는 것은 그동안 노무·인사를 맡아온 이용갑 부사장이 건강상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배] |